그의 민낯과 주권 없는 운동.
한국보수 유재흥의 민낯과 주권 없는 운동.
1953.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당시 북측은 김일성과 중국 팽덕회, 유엔의 윌리엄 켈리등이 서명인으로 나왔지만 남한 측은 서명인이 없었다. 서명인이 없는 이유가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 협정 에 기인하지만 그 원인은 당시 제3 군단장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재흥 때문이다.
유재흥의 2군단장 당시 덕천 전투에서 패전하여 아군을 전멸케 하였고 제3군단장 당시의 현리전투에서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 가버려 또 다시 아군들을 전멸케 하였다. 이러한 일로인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박탈하여 휴전 협정시 한국 측 서명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단한번의 승전 기록이 없는 패전의 원흉 유재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주었고 이후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또 다른 훈장을 주었으며 이후 성우회 회장 자리까지 주워 한국보수의 중심이 되어온 바, 그의 갑질 정치는 한국의 하늘을 가렸다.
"우리 땅과 동해병기"는 주권없는 운동이며 그로 인한 피해가 18대정권의 몰락에도 상당한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미뤄 짐작하는 바, 주권없는 뉴욕 동해운동자들에게는 갖은 혜택과 정치적 갑질 행사를 부여하였으되 주권을 주장한 사람에게는 갖은 모함과 그의 인격을 살해하여 왔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대일강화조약 당시도 주권이 없었고 휴전협정에서도 주권이 없었으나 "우리 땅과 동해병기"는 아예 주권포기를 만 천하에 公表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이 없었으나 오직 이평에서 주권 없는 우리땅 및 동해병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다시 한국해 캠페인으로 주권회복이란 큰 그림의 배경을 제안하였으나 듣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으며 다시 보고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어왔다.
'평화존중'의 유래는 -
2011년 6월경 日측의 국회의원 3명 정도가 울릉도를 시찰 한다 또는 방문하다하여 여론이 격화되었고 게다가 미국과 영국등 IHO 회원국들이 한국동해 해역에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계속적으로 지지한다하여 뉴욕 동포사회도 항의 여론이 들끓었던 그러한 시기에 광복66주년을 맞이하여 "한국해의 평화를 존중하라"는 호소의 의미로 "평화존중"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주권 없는 운동자에게는 유재흥과 같이 賞을 주고, 주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운동자에게는 갖은 모함과 그의 인격을 살해하였다.
이 세상 어느 하늘 아래 이따위 경우가 있단 말인가!
1953.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 당시 북측은 김일성과 중국 팽덕회, 유엔의 윌리엄 켈리등이 서명인으로 나왔지만 남한 측은 서명인이 없었다. 서명인이 없는 이유가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 협정 에 기인하지만 그 원인은 당시 제3 군단장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재흥 때문이다.
유재흥의 2군단장 당시 덕천 전투에서 패전하여 아군을 전멸케 하였고 제3군단장 당시의 현리전투에서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 가버려 또 다시 아군들을 전멸케 하였다. 이러한 일로인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박탈하여 휴전 협정시 한국 측 서명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단한번의 승전 기록이 없는 패전의 원흉 유재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주었고 이후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또 다른 훈장을 주었으며 이후 성우회 회장 자리까지 주워 한국보수의 중심이 되어온 바, 그의 갑질 정치는 한국의 하늘을 가렸다.
"우리 땅과 동해병기"는 주권없는 운동이며 그로 인한 피해가 18대정권의 몰락에도 상당한 영향이 미쳤을 것으로 미뤄 짐작하는 바, 주권없는 뉴욕 동해운동자들에게는 갖은 혜택과 정치적 갑질 행사를 부여하였으되 주권을 주장한 사람에게는 갖은 모함과 그의 인격을 살해하여 왔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대일강화조약 당시도 주권이 없었고 휴전협정에서도 주권이 없었으나 "우리 땅과 동해병기"는 아예 주권포기를 만 천하에 公表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이 없었으나 오직 이평에서 주권 없는 우리땅 및 동해병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다시 한국해 캠페인으로 주권회복이란 큰 그림의 배경을 제안하였으나 듣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었으며 다시 보고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어왔다.
'평화존중'의 유래는 -
2011년 6월경 日측의 국회의원 3명 정도가 울릉도를 시찰 한다 또는 방문하다하여 여론이 격화되었고 게다가 미국과 영국등 IHO 회원국들이 한국동해 해역에 '일본해' 단독 표기를 계속적으로 지지한다하여 뉴욕 동포사회도 항의 여론이 들끓었던 그러한 시기에 광복66주년을 맞이하여 "한국해의 평화를 존중하라"는 호소의 의미로 "평화존중"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주권 없는 운동자에게는 유재흥과 같이 賞을 주고, 주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운동자에게는 갖은 모함과 그의 인격을 살해하였다.
이 세상 어느 하늘 아래 이따위 경우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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