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자 7 개 ==
오래전 젊은 시절 비 오는 어느 날 퇴근길에 몇몇이 목로주점(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나누면서 한 친구가 자기가 어릴 때 생활이 너무 어려워 겨울 저녁엔
대부분 감자로 대신하곤 하였는데 그 감자의 수자가 늘 7개였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7개의 삶은 감자를 소쿠리에 담아 식탁에 올려주시면
누나와 둘이서 먹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하면
누나 보다 하나를 더 먹을 수가 있을까 하고 하루는 꾀를 낸 게
처음 집을 때 아주 작은 것을 골라 먹으면
일부러 빨리 먹지 않아도 네 개를 먹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소릴 안주로 해서 킥킥 웃으면서 소주를 들이키며
강 건너 일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볍게 귀 밖으로 흘러 버리곤 했었지.
그런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려웠으면
저녁마다 밥 대신 감자로 끼니를 때웠을까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시 이런 일이 그 집 하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먹은 만큼 키가 커진다는 나이에
겨울의 저녁은 정말 지겨울 정도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우리 집도 아픈 과거가 있다.
그 당시 우리 집만이 아닌 농촌엔 가을에 밭에서
뽑은 무청을 처마 밑에 달아 말렸다가
먹을 것이 없어지는 겨울의 저녁이면
이걸 물에 불리고 여기에 쌀알 몇 톨을 넣고는
죽을 끓여 저녁 한 끼로 먹는다.
어떤 집은 소나무의 걷 껍질을 벗기고 속을 물에 보름 정도 담가두었다가
불어나면 여기에 쌀 알 몇 톨을 넣어 죽을 끓여먹는 집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걸 먹고 나면 얼굴이 퉁퉁 붓게 된다. 그러면 이듬해 봄
새 쑥이 나오면 이걸 캐서 국을 끓여 먹고는 그 부기를 내리곤 했다.
그래서 당시의 농촌의 아낙네들은 들판에 새싹이 움트는 그 때까진
식구들을 연명케 해야 했기 때문에
입에 삼켜 죽지 않을 것이면
무엇이던 식구들의 입에 넣게 했던 게
나의 어머니, 우리들의 엄마들 이었다.
맛있는 건 아니라도 배불리는 못 먹여도
새끼들 굶기지 않으려고 그래도 죽이나마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그 엄마들은 해 질 녘이면 부엌 아궁이에 머리를 처박고 불을 지폈다.
그런 엄마들의 처녀 때의 고운 얼굴은 다 어디로 가고
얼굴엔 시커먼 손 자욱이 여기 저기 묻어
혹시나 자식들이 볼 세라 아무렇게나
손등으로 이래저래 훔치다 보니 호랑이 가죽 같아도
부엌에 아이가 들어오면 연기 난다고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부지깽이 든 손으론 아이를 밖으로 밀쳐내곤 했던 우리들의 엄마들..
이 눈물은
연기로 인한 눈물이었을까,
아님, 새끼들 배불리 못 먹이는
가난의 설움에서 오는 에미의 한(恨)의 피눈물이었을까?
그래도 어느 누구에게 원망의 빛 하나 없이 꿋꿋하게 살아주신 우리의 엄마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벽에 붙은 색 바랜 사각 틀 속에
살포시 미소를 담고 영정 속에 계신 우리의 엄마..
가난이 무슨 죄이던가?
사람에게 내리는 형벌 중, 가장 혹독한 벌이 굶겨죽이는 아사(餓死)라고 했다.
이렇게 그렇게 살다가 한 세대가 가고 다시 우리가 가고 해서 산 자는 가고
또 태어나고 해서 이렇게 사는 게 우리들의 삶이다.
어제 저녁으로 감자를 먹자면서 집 사람이 삶아 낸 감자를 먹다보니
갑자기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이 생각이 난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웠다 해서 불우했다거나 불행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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