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8월을 보낸다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1910년 8월29일, 이 날은 순종황제가 “나라를 일본 천황에 맡긴다”고 발표한 역사적으로 ’망국의 날, 경술 국치일’이다. 그해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총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일합방조약에 합의했고 일주일 후인 29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를 선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게 된 날이다.

한일합방조약의 제1조와 제2조를 살펴보자.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을 보면 정말 간교하고 무서운 놈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 조약을 해석하면, 마치 한국이 일본에게 “이 땅을 통째로 다 드릴 테니까 받아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애청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도 영구히....힘이 약하면 이렇게 당하게 된다. 미치도록 억울하게 당하고, 그로부터 36년간 일제 압박에 시달렸던 슬프고 굴욕적인 역사는 우리 국민 누구도 아는 바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 “8월 29일이 무슨 날이죠?”라고 물어봐라. 솔직히 이 날이 한(韓)민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국치일’임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8.29만이 아니다. 2주일 전인 8.15도 ‘바닷물도 춤을 춘다’던 광복 70년의 흥분과 감동도 잠시다. 충격과 분노, 회오와 다짐 속에 태극기 물결로 뒤덮이는 게 당연할 터인 8월의 광화문 광장은 ‘세월호 천막‘이 뒤덮여 국민들은 그저 무덥고 짜증나고 속이 부글거리는 한심한 8월로 바뀌어져 버렸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인에게 8.29와 8.15가 과거사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현실이라는 자각을 안겨주는 것은 ‘고마운 일본의 우익‘들이다. 그들에 대해 한국 언론이 가하는 연례적인 비판이 그나마 이날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일본이 “역사의식이 없다”느니 “역사를 잊고 있다”라는 말들이 그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일본 우익은 역사의식이 없고 역사를 잊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한 언론인의 말을 빌리면 오히려 현대 세계에서 일본 우익처럼 철저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정치·사회 집단도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8월은 "반성하자, 8월"이 아니라 "아깝다, 8월!"이라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 근처의 서점에는 당시 이길 수도 있었던 전쟁에 대한 회한을 가득 담고 복수를 다짐하는 듯한 책들이 판매대를 점령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은 바로 이곳, 야스쿠니 신사를 거점으로 역사의식을 불태우며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들, 역사를 잊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한국인들이 한다. 한국인이 일본 우익에게 역사를 잊었다고 비난할 때, 그 '역사'는 하나의 '도덕적인 비판'일 뿐이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는다는 ‘공자 말씀‘과 ’사과’하라는 말만 되뇌이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나쁜 놈이든 좋은 분이든 길만 있으면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지, 도덕적인 훈계로 그런 변화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길이 옳다면 역사 속에서 힘으로 입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그것을 입증하기도 전에 역사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

언론인 인보길님은 해마다 8월이 오면 대한민국은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지난날의 국치일도 부끄럽고 8월15일 광복절도 창피하다. 비록 남의 힘으로 얻어진 광복절이지만, 이 날은 원래 '국권 회복과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어야 한다. 하지만 ‘해방’만 광복이고 ‘독립’과 ‘건국’은 까맣게 잊은 채, 건국의 아버지도 중상모략으로 누명 씌우고 '건국'을 부정하는 이상한 정치집단-적대세력의 협박에 농락 당하는 법치가 무시되는 나라... 국민도 지도층도 학자도 교과서도 '광복'의 진정한 뜻조차 모른 채 생일도 아버지도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창피한 것은 망국을 침략자 탓만 하는 역사 무식, 망각이다. 과거 명나라 청나라를 의지하듯 미국만 믿고 나 몰라라 흥청망청하며 망국을 빚어낸 당파싸움을 그대로 답습하며 난리치는 망둥이들이 나라를 좀 먹는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은 소위 민주화 이후 지난 20여 년간 망둥이들 앞에 법과 공권력을 내던져 버린 채 그 망동(妄動)을 구경만 해왔던, 이 나라를 통치해온 위정자들의 한심함이 더더욱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돌아가신 우리 건국 조상님들은 이승만-박정희 덕분에 그동안 자유와 경제를 좀이나마 맛보았던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면 뭐라 말할까. 바깥은 북한이 연일 핵 공갈을 되풀이 하며 동북아의 신냉전시대를 부추기고 있는데, 나라 안은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정치꾼들의 싸움질만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억지와 불법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일찍이 핵을 포기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은 사면초가다.ㅡ박근혜를 안으려는 시진핑, 김정은과 손잡으려는 아베, 일본 재무장을 은근히 격려하는 미국, 푸틴의 야욕과 유럽-미국의 러시아 제재...등 파워게임의 불꽃은 언제쯤 폭발할 것인지, 모두가 전전긍긍이다. 원컨대 진정으로 넓은 시야를 가지고 강대국을 활용할 줄 아는 글로벌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8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