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중부 튀링겐 주에 속한 인구 4만이 거주하는 "아이제나흐"(Eisenach)에 왔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이용해서 아이제나흐 중앙역에 도착해서 종교개혁가인 루터의 흔적을 찾아서 갑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곳에 올라서 아이제나흐 시내를 내려다봅니다.
아이제나흐에는 루터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는 위 사진의 모습으로 감금되어
'루터의 방'에서 신약성경을 번역한 장소인 바르트부르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청소년 시절에 잠시 머물렀던 장소도 있습니다. '루터 하우스'입니다.
루터는 1498년부터 1501년 까지 3년간 '성 게오르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성 게오르그 학교'는 루터가 라틴어 수업을 받은 학교입니다.
지난 2017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라서 그때 루터의 흔적을 보려고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방문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방문한 때는 2019년 5월입니다.
루터 광장에 가면 여기도 마르틴 루터(1483-1546) 기념비가 이렇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 동상은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감금 되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일(1521년)이 발생한 375주년 기념으로 1896년에 여기에 세워졌습니다.
아이제나흐에는 또 다른 유명 인물이 이 도시를 빛내고 있습니다.
전에 이미 소개를 한 '음악의 아버지' 인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 입니다.
바하는 루터보다 정확히 202년 후에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루터는 근처에 있는 '아이슬레벤' 에서 태어나서 '아이제나흐' 에서는 청소년기인 15살부터 3년동안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해서 머물렀고 바하는 여기서 아예 태어나서 10살 까지 살았던 그런 역사가 있는 도시입니다.
루터가 다녔던 '성 게오르그 교회' 에서 바하는 유아 세례를 받았고
루터는 그 교회에서 청소년 성가대를 한 역사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루터는 독일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인물입니다.
독일의 코랄(Chorale)을 종교개혁의 수단으로 루터는 사용하였습니다.
독일 코랄이란 자국어로 만든 회중 찬송을 말합니다.
루터는 37편의 코랄을 직접 만들어서 전파 하였습니다.
음악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루터를 가장 잘 이해한 작곡가는 바로 루터교 신자인 바하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루터는 신학 다음으로 두번째로 음악이 중요하다고 강조 했습니다.
바하와 루터의 관계를 한참 설명 하다보니 목적지까지 다 올라왔습니다.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유명인을 배출한 아이제나흐를 다시 내려다봅니다.
아래서부터 걸어서 올라왔는데 노약자들에게는 좀 힘든 코스입니다.
성은 410미터 높이의 절벽에 세워져 있습니다.
방어용 대포입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산 정상에 자리하여 방어 능력이 뛰어난 요새입니다.
아이제나흐 시의 역사에서 바르트부르크 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높습니다.
1067년 바르트부르크 성이 건설되면서 아이제나흐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12세기에는 튀링겐 영주들이 도시를 세웠고. 13세기에는 베틴 왕가로 넘어 갔습니다.
16세기 이후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의 중심지였다가 1809년에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에 속하게 됩니다.
이 모든 역사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남아 있습니다.
이 근처에는 아름다운 트레킹 길이 있는데 시간상 가보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다음에 가면 도시에서 하루나 이틀을 아예 숙박하며 자세히 둘러봤으면 합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루터 외에도 많은 역사적인 인물과도 관련이 있는
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그 자체가 박물관이라고 할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그 장소에서 서서 기념 사진을 한장 남깁니다.
이 분은 현지인으로 아이제나흐 중앙역에서 부터 바하 생가까지
나에게 길을 안내해준 친절한 사람인데 여기 올라와서 다시 만났습니다.
서로 반가와서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성에 머물면서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였습니다.
보룸스 제국의회에서 황제 카알 5세에게 대항한 루터는 목숨이 위험 했습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길에 루터를 위장 납치해서 안전하게
이 성에 대피시킨 사람은 선후제 현자 프리드리히 3세 였습니다.
그리고 기사로 신분을 위장시켜서 이름도 루터가 아닌 융커 외르크(Junker Jorg)로 바꾸게하고
수염까지 잔뜩 기르게하여 아예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생활하게 하였습니다.
루터는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1일까지 10개월 정도를 여기서 숨어서 지냈습니다.
그 기간에 그당시 그리스어로 된 신약성경을 루터는 불과 11주만에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이미 독일 문학과 법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한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그 자체 가진 문학적 가치로 독일 문학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선제후의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루터는 로마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던지 아니면
언제 어디선가 로마 카톨릭교회 과격분자에게 쥐도새도 모르게 암살을 당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래서 보이지않는 도움의 손길은 자신이 전혀 기대치않은데서
알수없게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날수 있는겁니다.
루터의 생명에 도움을 준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은
자신에게도 루터를 숨긴 장소을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다 합니다.
만약 본인이 장소를 알고 있다면 후에 정치적으로 커다란 곤경에 빠질수도 있을테니 말입니다.
선제후 자리는 차기 황제를 꿈꾸는 그런 자리라고 합니다.
그는 루터와 개인적으로 가깝지는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루터가 한말이 한 귀절 생각납니다.
"인쇄는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은총의 선물이다."
구덴베르크(1398-1468)가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용해서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그후 급격히 독일 지역 전체로 보급 되었습니다.
바르트부르크 성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합니다.
성문 밖에서 성 안을 바라본 풍경입니다.
퓌센의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주인인 '루드비히 2세' 가 작센 지방을 여행할때
이 성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르트부르크 성 투어는 이번에 하지 못했습니다.
안에는 루터가 신약성경을 번역한 '루터의 방'을 포함해서
볼곳이 여러개 있는데 다음 방문때로 미루기로 하였습니다.
이건 성 안에서 성 밖의 풍광을 보는 광경입니다.
실로 아름답습니다. 독일에서 아름다운 성을 꼽을때
'바르트부르크 성'은 빠지지 않는 목록에 들어 있습니다.
튀링겐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성문입니다.
중세시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폴란드까지 이어지는 무역로의
한 관문으로써 상인들이 반드시 통과하는 교역의 중심지 였다고합니다.
루터의 기념 동상 옆에 서서 기념을 해봅니다.
바하가 아이제나흐 도심지에서 내눈 앞에 또 나타납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니콜라이 교회 내부로 갑니다.
성 니콜라이 교회 근처에는 세계 2차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을 기리는 기념 동상이 있습니다.
미리 예매한 기차 시간에 맞추려고 바삐 걸어서 갑니다.
루터가 3년간 살았던 집은 현재 박물관인데 그 곳도 못보고 이번에 그냥 갑니다.
다음에 '성 게오르그 교회'랑 같이 '루터 하우스'를 방문해야 겠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가는 기차를 타려고 아이제나흐 역에 제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였습니다.
여행를 하다 보면 간혹 시간상 이렇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다음에 올땐 시간을 더 넉넉히 잡고 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루터와 바하'를 만난 '아이제나흐'를 떠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