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장머리 발언으로

YS의 ‘버리장머리’ 발언 이후 일측의 보복으로 1999년도 IMF가 터졌으며, 2005년 3월 다께시마 조례 행사를 강행하였다.  조례 당시 주일 한국대사는 일측의 강한 압박으로 쫏겨나다시피 한국으로 귀국(피신)하였다. 


이라한 상황에서 평 선생이 ‘조례반대-독도한국’으로 2005년 3월 20일경 뉴욕 일 대사관앞에서 독도집회를 가졌으며, 이후 평선생(김나현)이 독도 홍보물자 자비로 1천매 제작하였고,  2006년도에는 그 유명한 ‘Dokdo of Korea’ 역시 자비로 제작 배포하여 뉴욕독도 캠페인이 사작되었다. 


이후 독도 관심 동포들이 늘어나며 각종 문화 행사들도 따라나왔다. 그러나 동해운동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여자를 찾아라‘라는 글들이 올라왔으며 동해 운동자들은 막대한 국민성금 , 지원금등 각종혜택으로 수많은 고급인력들을 총 동원하여 여자들 널뛰기처럼 뉴욕을 중심으로 종횡무진 가김없이 10년이상 널뛰다 결국 매가리없이 망하였다. 그러나  평선생이 자비로 제작한 홍보물자와 최근의 '항접착제'는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제목: 버르장머리 2015.04.26

https://www.ktown1st.com/ktalk/detail/87324

1997년5월 당시 유종하 외무장관은 미국방문 길에 수행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어업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가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아래 그림에서 일본은 일본해 앞세우며 'JAPAN EEZ'(Exclusive economic zone)라 하고있다.


1998년9월 최종 마무리된 한·일간 신어업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됐다. 새 유엔해양법조약에 따른 양국간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획정 문제가 맞물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인데다, 한국으로서는 나포된 선박과 선원 처리에 있어서 ‘명분’까지 확보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명백히 일본이었고, 한국은 “한·일간 어업문제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로 맞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YS정권은 결국 97년10월 일본측이 제시한 ‘잠정공동수역안’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같이 판을 깰 경우 우리 어민들이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 담화 발표 "경제위기 책임통감, IMF협정 지킬 것" 중앙일보 1997.12.11 10:00

"YS, 11일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위기와 관련,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

하였다."  ---------------------


만약 평선생의 캠페인이 없었다면 독도EEZ가 아니라 다께시마 EEZ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없는 당시의 상황이였으며, 평선생의 한국해는 미의회 위안부안건 통과에도 큰힘이되었고 2015년도 10억엔 위안부 헌금도 받게한 동력이였으며,  작금의 한국외교의 '미.일.한 협력강화'  전략도  열당의 글에서 나온것으로 추측이된다. 


한반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길'이나 분단이후 적당한 아젠다 없이 표류하여왔다. 

그러다 최근 평선생이 한국해에 이어 '항접착제'를 창안하였으며 동안건은 창의적이며 절대적 안건이다.   


망해버린 동해운동자들이 남긴것은 '평선생 인격 무시하는 일' 그 이외에 해온일이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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