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정희' 패륜적 시위정치 때문이였다.

작금의 한국 20대선 선거전은 '생 양아치들의 정치'라 한다. 

한반도 분단이 낳은 가짜 민주화 5.18은 민주화가 아니며 국가 유공자는 더더욱 아니다. 

5.18 시위대는 김대중 추종자들이였으며 그들은 '거짓 유언비어 남발과 무장폭력으로 피 튀기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제작하였다.' 


민주화는 비 폭력적 항거여야 한다. 

언제 그들이 평화적인 시위들을 하였는가-  

악마와같이 무장폭력을 행사하여 무고한 많은 경찰들은 죽였다. 

경찰들은 가족이 없는사람들인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5.18사격'은 이미 국방부와 검찰 조사로 재판하여 "시민군의 차량 돌진으로 공수부대원이 자위권 차원에서 대응사격하였다."로 이미 결론이 난 안건이였다. // 비열한 정치의 산물 '가짜 민주화 5.18'에 엎드려 절하고 한표라도 더 얻으려 몸부림치는 더럽고 파렴치한 저 정치작자들을 보라! 



광주사태를 묘사한 영화 '화려한 휴가'의 내용- "오후 1시 정각이 되자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수백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려퍼졌다. 공수대원들은 앉아쏴, 서서쏴 등 정조준 자세로 금남로의 비무장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했다. 발포는 메가폰으로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10분가량 계속됐다. 금남로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순식간에 텅 비었다. 쓰러진 사람들의 핏물이 흥건히 아스팔트를 적셨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금남로를 울렸다."  이것을 그들은 '사실에 근거한 영화'라 했다. 1천만명이 시청할 정도로 인기 높았던 '화려한 휴가'의 시위대 학살 장면은 그야말로 '악마적 왜곡' 그 자체였다. 


검찰: '병력들이 당초에는 소위 폭도들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인근 마을을 수색하여 일부 총을 가진 시위대를 체포했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무관한 동네 젊은이들을 소위 폭돌 오인, 현장에서 즉결처분한 사실이 있었는가요.' 안: '당시는 부상자 후송과 사후 처리에 정신이 없어 확인한 사실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병력들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이성을 잃고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安富雄 피의자 신문조서(4회) 1995년 12월31일 서울지방검찰청.


5.18 원인 관련글

정권공백기- 역사상 가장 위험한 안보의 불안기를 맞았던 이 시기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주도권 경쟁을 벌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영삼은 정당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대중에는 당이 없었다. 김영삼이 과격한 용어를 쏟아내며 최규하 과도정부의 해체를 압박하는 성명을 내자 김대중은 이에 질세라 더 과격한 행동을 주도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려하지 않았다. 1979년 3월 1일 그는 사실상의 혁명기구라 할 수 있는 ‘국민연합’(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함으로써 신민당을 가지고 있던 김영삼보다 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80년 3월 26일, YWCA 강연회에 나가 이렇게 강연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이다"  '민주화를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만 한다' 는 무서운 선동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의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980년 4월 10일 오후 8시경, 북악파크호텔501호실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10여명과 회합하고 국민연합이 계엄령 해제, 정부주도 개헌포기, 유신잔당 퇴진, 정치일정 단축, 구속자 석방 복권, 학원자유, 자유언론 실천 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국민연합을 대폭 개편하고 과거 투쟁 경력이 풍부하고 각 학생지도부와 연계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장기표를 조직국장,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각 임명하기로 결정하는 동시, 이들 3인에게 학원 선동임무를 각 부여하고, 위 참석자들에게 “작금의 국내정치 정세를 분석하여 볼 때 나로서는 신민당내 당권파의 강력한 반발로 지지기반 확장이 어렵고 군부의 지지기반이 없고, 3.11. 신 총리와 3.15. 최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볼 때 선거로서는 차기 대통령에 당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바라볼 수 없으므로 정당 활동보다는 국민연합을 위시한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민주화운동을 내세워 학생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면 교외로 유도하여 시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아울러 우리 조직을 가세시켜 대대적인 본격적 시위를 전개하면 현 정부는 궁지에 몰려 우리의 민주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 여론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하여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였다.


이어서 국민연합은 다음 날인 4월 11일의 서울대학생회 주최의 학생추도식에서, 4월 16일의 한국신학대학 학생회주최의 학술강연회에서, 4월 17일의 서울대학생회주최의 4.19기념강연회에서, 4월 18일의 동국대학생회 및 인하대학생 주최의 4.19기념강연회에서, 과도정부를 유신체제 옹호세력으로 몰아붙이고 학생들의 투쟁을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1980년 4월16일, 한국신학대학교 학생회 주최 학술강연회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특권층은 수십억원의 호화주택에서 기천만원의 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개를 한다. 독재 하에서 감옥에 가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학원과 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980년 4월 17일,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열군(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되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한 것이다. [출처] 계엄령은 왜 선포되었는가? 5.18폭동과 김대중|작성자 Khan


끔직한 5.18 사태의 원인은 정권 탈취에 눈먼 김대중의 '반-박정희' 망국적 패륜정치 때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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