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내가 잉크를 처음 써 본것은 중학교 때 영어 수업 시간에 알파벳 연습을 하기 위해서 였다. 펜에 잉크를 묻혀 정성스레 써 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곧 쓰기에 매우 편리한 모나미 볼펜이 나오고, 또 필요에 따라 볼펜을 연필과 함께 쓰다가 값비싸지만 편리하고 멋지게 보이는 만년필에 호기심이 간 것은 매우 당연하였다.
그러나 잉크를 넣어 써야 하는 번거러움 때문인지 나는 만년필을 거의 써본 기억이 없다. 그러던 얼마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Parker 51 ® 만년필에 관한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파카 볼펜은 내가 선물로 받아서 쓴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파카 볼펜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필기감이 생생하다. 만년필을 수집하는 만년필 고수들이 인터넷에 올린 영상을 보고 알게된 사실은 그간 만년필의 불편한 점들이 꾸준히 개선 되었다는 점과, 1888년 창립한 파카 회사의 경우도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특히 회사의 대표적 만년필인 Parker 51®을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Parker 회사가 2021년 특별히 다시 출시하게 됨을 알았다.
Parker 51은 미국 Parker 사에서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The World's Most Wanted Pen (세계에서 가장 원하는 펜)"이라고 광고하면서 처음 출시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수년동안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회사창립 51주년인 1939년을 기념하여 이 제품은 Parker 51로 명명되었고 디자인이 특허출원 되었다. Parker는 펜에 이름 대신 숫자를 부여함으로써만년필의 이름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실로 반세기가 넘어 우연히 만년필의 향수에 다시금 젖게 되어 최근 출시된 만년필을 한번 써보고자 하는 조그만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연구를 해 본 결과로는 Parker Jotter라는 제품이 가격도 싸고 초보자가 별 부담없이 쓸 수 있다며 많은 사용자가 사용후기를 남겨 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년필, 잉크, 그리고 컨버터(converter)라는 잉크를 담아 만년필에 끼우는 잉크저장 용기, 이렇게 세개의 품목을 아마존에 즉시 주문하였다. 만년필에 끼우는 잉크저장 용기는 일회용으로 cartridge (또는 filler)로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으나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영어시간 장난하다 잉크를 엎질러 교복에 잉크가 튀겨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곤 했던 추억이 생각나 잉크를 병째 주문하였다.
배달된 제품들을 보니 재미있게도 세개의 품목 모두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나중에 조금 더 조사를 해보니 파카의 원산지는 미국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파카 제품을 생산하는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최근 작고한 엘리자베드 여왕 시절 파카를 영국왕실의 공식 필기구로 지정하였고 자신도 평소 파카를 아주 애용하였다고 전해온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1945년 5월 7일 프랑스에서 “The German Instrument of Surrender”라는 독일의 항복문서에 두개의 만년필로 서명할 때 1945년 생산된 Parker 51을 이용하였고 그 펜은 아직도 빠리의 Musee de l’Armee에 전시되어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도 미항공모함 미조리호 (U.S.S. Missouri) 갑판에서 1945년 8월 Parker Duofold Big Red펜을 사용하여 일본과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항복문서인 “Instrument of Surrender”에 서명하였다. 이후 Parker는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현대적인 듀오폴드 기념 시리즈를 다시 만들면서 이를 선전하였다.
세상이 급속한 속도로 발전하며 모든 것들이 디지털화되고 자동화 또는 기계화가 되면서 발전해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애널로그화, 수동화, 그리고 인간화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 꽤 오래 살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어떠한 제품이라도 새로운 제품이 시장에 나오더라도 아직도 소수의 고객들이 옛날 제품에 대한 수리나 관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제도의 실천이나 또한 인식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이 수필을 쓰면서 생각나는 다른 하나의 이야기. ‘The Ultimate Pencil Pusher’라고 불리웠던 미국의 저명한 소설가인 John Steinbeck이 즐겨 사용하던 ‘Blackwing 602’라는 연필도 그간 생산이 중단되었다가 세계 각지의 연필 애용자들 특히 문필가, 예술가, 그리고 연필 수집가들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다시금 생산을 재개하게 되었는데, 그 가격은 결코 만만치가 않지만 꾸준히 팔려 나간다고 한다. 그 연필을 쓰는 사람들은 다른 제품들을 거의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몇몇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몇년 전 나는 다양한 종류의 이 연필을 선물로 받는 호사를 누렸는데, 연필의 필기감은 참으로 부드럽고 깨끗하였다.
글씨를 많이 써야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필기구에 늘 관심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는데 필기구도 역시 돌고 도는 모양이다. 새로 구입한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오랜만에 글씨를 써보니 어린시절 조그만 교실 책상에 앉아 또박또박 영어를 써 내려가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아련히 떠 오른다.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 데, 마음의 거울을 글씨로 써서 나타내는 도구인 만년필, 그리고 연필에 대해 마음 가는대로 써보았다.
2023년 9월 11일
淸淨齋에서
솔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