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6일은 미국의 Father’s Day 였다. 어버지의 날을 맞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님이 떠나신지 벌써 40년 넘는 세월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내가 이제 아버지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더더욱 내 마음 속에 남는 아버님의 고귀한 정신적 유산인 교훈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고, 각 교훈에 대해생각나는 관련된 일들을 자유스럽게 간단히 기술해 보고자 한다.
아버님께서는 틈 날때마다 두 글자 (誠實)를 붓글씨로 쓰시곤 하셨다.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으셨지만 늘 마음속에 다짐하며 성실하게 생활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내가 철 들어가면서 확연히 알게 되었다. 필자는 아버님의 휘호 ‘誠實’을 아직도 간직하고 가끔은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매사에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 직선적이고, 깨끗하고, 그리고 신중하게 임하시는 자세를 보았다. 어떠한 변명이나 핑계는 전혀 내 기억에 없다. 우리나라의 혼란기 시절 아버님은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셨는데 문중의 제각을 작전상 소각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여러 강한 반대를 온몸으로 홀로 막아내신 적이 있고, 해남의 아름다운 천년고찰인 대흥사(大興寺)와 유명한 비자림(榧子林)도 군사작전상 소각해야 한다고 하자 어려움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끝까지 훌륭한 국가적 문화유산의 보존을 주장하셔서 지금까지 절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엄격한 유교적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고, 민족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담력과 용기가 충만한 분이어서 이러한 일들이 모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평생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셨지만 이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결코 이를 내세우시지 않고 사셨다. 60여년이 지나 아버님의 공훈사실이 확인되고 정정되어 국립묘지에 늦게나마 안장되실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자상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어머님과 자식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늘 한결 같았다고 생각된다.
8남매의 대식구에 많으면 최대 5명의 일가친척을 함께 거느리시면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집안 어르신으로서 이들을 모두 돌보아야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 불평을 들은 적이 없고 가족이 아닌 일가친척도 늘 가족처럼 모두 똑같이 대하셨다.
나는 어릴적부터 한번도 아버님께 맞은 적이 없고 심지어 욕을 들은 적도 없다.
모든 일에 매우 당당하셨다. 한 예로 내가 재학중인 고등학교에 방문하셨을 때 교장선생님과 먼저 교장실에서 두 분이 진지하게 면담하고 계셨다. 나중에 교실에 잠깐 오신 것 같은데 번개처럼 사라지셨다. 급우들을 통해 아버님의 학교방문 소식을 나는 나중에야 들었다.
우연히 어릴적 아버님께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시느냐고 내가 당돌하게 여쭈었더니 시골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대답하신 기억이 난다. 말년에 병상에 계시면서도 손가락으로 공중에 붓글씨 연습을 틈나는대로 계속 하시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내게는 새롭다.
공부에 관한 일화: 필자가 아마 고등학생 시절인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무렵에 저녁에 좀 늦게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공부 못하는 애들이 책상머리를 붙잡고 늦게까지 공부한다.”고 하시면서 불을 끄고 즉시 취침하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결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입으로 말씀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는 오히려 결과적으로 내가 평소에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학창생활을 알차게 보내게 만들었다.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로 아버님은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라고 하셨다. 매섭게 추운 어느 겨울날 할아버지께서 매우 위독하게 되셨을 때 할아버님의 병구완을 위해 구하기 힘든 잉어를 잡으러 즉시 혼자 나가셨다고 말씀해 주셨고 홀로 되신 할머니도 큰아들로서 극진히 봉양하셨다고 내게 말해 주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