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역술인의 한마디가 영부인을 만들다!

2021.12.02

 




                    역술인의 한마디가 영부인을 만들다! 

 

 前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 고(故)육영수여사는 충북 옥천출신이다. 옥천일대의 손꼽히는 갑부였던 만석꾼인 부친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여사 사이의 1남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해방 뒤 잠시 고향의 옥천여중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어머니 이경령여사는 고전적인 여필종부의 미덕을 갖춘 여성으로서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타입이었다. 육종관씨는 자수성가하여 당대에 만석꾼이 된 입지전 적인 인물이었는데 보통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두뇌가 비상하고 근면‧성실한 이여서 이런 성공이 가능했다. 


왜정 때 옥천군내에서 승용차를 지닌 유일한 이였고 집에다 활동 사진기를 설치해 놓고 무성영화를 즐기는 누구보다 앞서가는 개화된 인물 이었는데 여성편력 또한 왕성해서 모두 5명이나 되는 소실을 거느렸다. 일본인 소실도 있었고 두 자매가 함께 소실이 된 ‘개성집 자매 ’‘옥천집’‘ 영광집’ 등등으로 불리는 소실이 있었다. 어떤 때는 서울이나 옥천 읍내에 살림을 차리기도 했지만 대개는 본처와 한 지붕에 거느리고 살 때가 많았다 한다. 이러다보니 본처와 사이에 낳은 1남3녀 외에 10여명의 서(庶)자녀를 두는 정력을 과시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경령여사는 투기하지 않고 묵묵히 큰마님 으로서 집안을 다스려나갔다. 이럴 정도로 남편에게 순종적인 이경령여사가 남편의 뜻에 맞서 크게 다툰 일이 있으니 바로 딸 영수의 결혼 문제였다. 


딸의 나이가 당시 혼기를 넘긴 26세가 되었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육종관씨는 딸의 혼사에 무심했다. 거느린 5명의 첩 간수하기에 정신이 없어서였는지 이런 태도를 보이자 이경령여사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여 옥천의 유명한 역술인 모씨를 찾아가 딸 영수의 혼사 점을 보게 되었다. 딸 영수의 사주팔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역술인은 “따님은 재취로 가야 액땜을 할 수 있습니다. 총각에게 시집을 가면 그 총각이 죽어 따님은 청상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무기를 든 사람에게 재취하여야 고귀한 신분이 될 것입니다. 내말을 흘려듣지 말고 꼭 명심하십시오!” 라고 진단하자 이경령여사는 기절할 정도로 낙담하고 말았다. 귀하디귀하게 키운 딸을 재취로 시집보내야 한다니 기가 막혔다. 


이러고 있던 중 이경령여사의 친정 5촌 조카(이경령여사의 친4촌언니의 아들)송재천 소위가 집에 놀러왔다. 송재천 소위는 (故)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 사범학교 1년 후배로 뒤늦게 군에 입문하여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인 박정희 소령의 부관으로 근무중이였다. 당시 대구 사범학교는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명문이여서 이 학교 출신인 송채천 소위는 집안 어른들이 신뢰를 받고 있던 처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송 소위가 이종 6촌동생인 영수의 안부를 묻자 이경령여사는 “얘야 재천아! 우리 영수 신랑감 좀 알아보아라. 저거 아비라는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인지 통관심이 없으니 큰일이다. ” 이런 한탄에 송재천은 자신의 상관 박정희를 망설임 끝에 추천한다. 


이때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직전에 부모의 강요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 딸 하나를 낳고 계속 떨어져 살다 이혼을 하고 딸 박재옥은 고향의 장조카 집에 맡겨두고 있는 처지라 추천하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조카의 추천을 받은 이경령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만다. 옥천의 유명 모 역술인이 이야기한 재취자리에 손에 무기를 든(군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운명이라 생각한 이경령여사는 남편 육종관씨에게 어렵게 이 이야기를 꺼내자 예상대로 육종관씨는 노발대발했다. 재취 자리라니 말도 안 된다는 거였다. 이에 이경령여사는 생전 처음으로 남편에게 맞선다. “그럼 당신이 어디 가서 신랑감을 구해 오시구려! 첩 질에 정신이 없어 딸 혼사에는 영~관심이 없더니 어렵게(?) 구한 신랑감이 좀 흠이 있다고 타박만 하는데 우리집안 내력을 따진다면 딸 시집은 다 보냈지 뭐요? 


색시 집 아버지가 다섯이나 되는 첩을 거느리고 서 자식만 열명이라면 어떤 집에서 아들을 장가보내겠어요? 장인한테 첩 질하는 재주만 배울텐데!” 생전 첩문제로 트집을 잡지 않던 본처가 이렇게 나오자 육종관씨는 할 말이 없었다한다. 육종관씨는 아무튼 안 된다고 한 뒤 그 자리를 면했고 그 후 이경령여사에게 “당신 맘대로 해! 더 이상 나는 개입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을테니까!” 라고 한 뒤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서로가 인연이 될라고 했던지 선을 보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맘에 들어 했는데 육영수여사의 경우 6촌 오빠인 송재천이 추천한 남자이니 틀림없을 것이라 믿는 마음이 더 강했을 것이고, 대구 사범학교 출신이고 정식 일본육사 출신인 신랑감의 학벌도 마음을 움직이는데 플러스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육종관씨는 고집을 꺾지 않고 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육종관씨의 고집은 대단해서 훗날 박정희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사위를 탐탁치않게 여겨 사위를 홀대했고 만만한 성격이 아닌 박정희 대통령도 끝끝내 장인과 화해하지 못했다. 훗날 육영수여사가 영부인이 되었지만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목숨을 잃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79년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부부가 다 흉사(凶死)하니 이들의 결혼에 반대한 육종관씨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인지 아니면 딸의 결혼을 강행해 딸을 영부인으로 만든 어머니 이경령여사가 옳았던 것인지 헷갈린다. 아무튼 한 역술인의 한마디가 영부인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이 역술인의 충고가 없었다면 육영수여사의 어머니 이경령여사가 그토록 심한 남편 육종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딸의 결혼을 강행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여사도 부부로서의 연이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역술가의 말 한마디는 개인의 운명과 크게는 역사를 만들기도 하기 에 큰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고로 필자는 오늘도 공부에 공부를 거듭한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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