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1925년 경성일보 풍수사기사건

2021.12.04

 


               1925년 경성일보 풍수사기사건


 우리나라 조선을 팔아먹은 을사오적 중 최고 우두머리인 이완용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어마어마한 은사금과 후작의 작위까지 받았다. 작위 중 최고작위인 후작은 그 아래 백작 그 밑의 자작 나머지 남작의 작위 중 최고의 대우를 받는 작위여서 그만큼 일제로부터 매국에 대한 대우를 후하게 받은 셈이다. 이놈은 집안관리도 개 차반이여서 아들이 일본에 유학 가있는 동안 며느리와 눈이 맞아 같이 자빠졌다. 이른바 개만도 못한 놈인데 아들이 귀국하여 이 현장을 목격하곤 목을 매서 자결하자 당시 신문에서도 이 소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더럽고 추악한 놈들이 명은 길다. 


열혈청년 이재명의사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명동성당 앞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던 이 매국노를 덮쳐 칼로 여러 차례 난자했으나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해 살아나게 된다. 죽을 놈은 안 죽고 22세의 꽃다운 젊은 청년만 사형을 당하고 만다. 이놈의 형제들 또한 개차반이었다. 난형난제인 것이다. 이완용의 친형 이윤용도 역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남작의 직위를 받고 한성은행의 첫 번째 행장에 임명된다. 이윤용도 행실이 나빠 한성은행장 시절에도 인근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추문을 뿌려댔는데 처녀, 유부녀, 노소를 불문하고 그저 치마 입은 여자라면 무작정 덮치고 다녀 소문이 더러웠고 피해자도 많았으나 워낙 세도가 있어 관할 종로경찰서도 어쩌지 못하고 골치를 앓았다 한다. 


이놈이 이렇듯 주색에 빠져 미쳐 돌아치다보니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기우는 가세에 고민에 빠진 이윤용을 옆에서 보좌하던 고용인 김 아무개는 이틈을 이용하여 이윤용의 금품을 가로챌 계획을 세웠다. 당시 서울에서 꽤나 알려진 관상쟁이 김문모(金文模)는 김 아무개와 어릴 적 같이 자란 친구였는바 김 아무개는 김문모와 공모하여 기울어지는 가세 때문에 크게 걱정하던 이윤용을 속이려 계획을 짠다. 김 아무개가 상을 찌푸리고 고민하는 상전 이윤용에게 “대감마님! 시중에 유명한 관상쟁이 김문모를 한번 불러다가 가세가 확 살아 날 수 있는 방법을 한번 물어보시지요! 일전에 제가 소문을 들으니 민 모 대감님 댁도 가세가 기울다가 김문모의 처방을 듣고 그대로해서 가세가 다시 확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한번 불러볼까요?” 


귀가 솔깃해진 이윤용은 “험! 험! 내가 뭐 꼭 그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니 뜻이 그리 간절하니 한번 그리해 보거라!” 헛기침을 하며 승낙한다. 민문모는 김 아무개의 부름을 받고 득달같이 달려와 이윤용을 만난다. “대감께서 지금 살고계시는 대화궁(大和宮)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옛 영광은 사라지고 앞으로 점점 가세가 기울어 종국에는 쫄딱 망해 가솔모두가 떼거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라는 김문모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에 이윤용은 사색이 되어 “여보게!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화를 피해 갈 방법이 없겠는가? 제발 그 방법 좀 알려주게! 아니? 알려주십시오. 도사님!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꼭 사례 하겠습니다.” 


말투까지 바꿔가며 애걸을 하자 민문모와 김 아무개는 슬며시 눈빛을 주고받으며 눈웃음을 쳤다. “정 그러시다면 천기누설이지만 방법은 한 번 연구해 보겠습니다” 라고 한발을 빼서 뜸을 들인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소식이 없자 초조해진 이윤용은 안달이 난다. 김 아무개를 독촉하며 “도사님께서 아무소식이 없으시냐? 왜 이리 시간이 걸린단 말이냐?” 안절부절 하자 충분히 뜸이 들었음을 알고 김 아무개는 다시 김문모를 부른다. 이윤용 앞에 앉은 김문모는 천천히 입을 열어 “대감댁 가문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은 딱 한가지입니다. 이집을 팔고 다른 곳에 땅을 산 뒤 굿을 하고 집을 새로 지어야 다시 가문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결국 이윤용은 잘 알고 지내던 한일은행장 민대식에게 자신의 집을 사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했고 민대식 가문사람인 남상순 에게 일금 5만원에 매각하게 된다. 선금으로 3만불을 받고 잔금 2만불은 집을 비워준 뒤 받기로 했다. 김문모는 이윤용에게 “이돈(3만원)을 청색과 홍색 보자기로 정성껏 싸서 불흥사(佛興社) 신령전에 올려놓고 하루밤낮을 간절히 기도해야 액운이 떨어집니다.” 라고 하였다. 이윤용은 김문모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윤용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김 아무개와 김문모는 몰래 보자기에 든 현금을 꺼내고 대신 현금처럼 자른 종이조각 뭉텅이를 채워 놓았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기도를 마친 이윤용은 집으로 돌아온 뒤 보자기를 풀어보았다가 실성할 듯이 놀라고 만다. 


돈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쓸모없는 종이 조각만 보자기속에 있었던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이윤용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종로경찰서에 고소하였으나 김 아무개와 민대식은 멀리 도망을 치고 난 한참 후였다. 이윤용은 이일로 큰 병을 얻었다. 가뜩이나 주색잡기에 몸이 상한데다가 그나마 마지막 재산이었던 집마저 날려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1925년 6월22일 경성일보는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둔 것이다. 이후 이윤용은 동생 이완용에게 돈을 좀 차용해줄 것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매일저녁 사람을 시켜 이완용 집에 돌을 던지게 한다. 잠복하던 형사에게 붙잡힌 하수인은 이 사실을 경찰서에서 몇 대 얻어맞은 뒤 실토하였고 경찰서에서 만난 형제는 서로의 부모(?)를 욕하며 드잡이를 한다. “이 개놈의 자식아!” “뭐라고 너는 개잡년의 자식이다!” 쯧쯧! 참 열심히 살았던 개 같은 놈들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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