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udowon님의 다른글 더 보기 :: 총 1104
목록 닫기목록닫기 목록 열기목록열기
문화/창작

조선최고의 칼잡이 가수에게 살해당하다!

2022.08.13

 




                조선최고의 칼잡이 가수에게 살해당하다! 


 신문을 보면 ‘오늘의 운세’라는 란이 있다. 띠에 따라 그날의 운세, 즉 일진을 개괄적으로 예측한 내용인데 이것은 순전히 ‘심심풀이’정도라면 모를까 신빙성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같은 띠 즉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의 그날 운세, 일진이 똑 같을 수가 있겠는가? 심심타파 식으로 참고하는 정도면 충분하리라. 필자에게도 그날의 일진에 대해 묻는 이들이 많다. 일진이란 그 사람의 사주팔자에 따라 그날의 행‧불행 여부에 대해 진단하는 것인데 개인 개개인의 사주팔자에 따라 그날의 천간지지에 맞추어서 해석하기에 같은 띠를 지닌이라도 수천수만의 개인의 사주팔자에 따른 일진이 나올 수 있다. 결혼에 좋은 날을 묻는 택일이나 시험 보는 날의 당일운세를 묻는 등 인생에 있어 중요한 날의 행‧불행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일진이 사나우면 그날 하루가 매우 고달프다. 일진이 좋지 않은 날에는 근신하며 경거망동을 삼가는게 최선의 방법이다. 일진이 사나운 사람끼리 당일 부딪치면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건사고를 부르기도 한다. 일진 사나운 두 사람이 부딪쳐 큰 사고를 낸 사건이 있다. 


일제후반기시대 때(1935~1945년 사이)유명한 작곡가이자 가수인 김용환이란 이가 있었다. 조자룡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는데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작곡했으며 직접 불러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원산출신인 그가 고향인 원산에 공연을 위해 길을 나섰다. 같은 악극단 단원들과 공연에 앞서 시간이 남자 당구장에 들러 공을 치다가 원산의 유명한 조선최고의 칼잡이 창씨명 기무라와 마주쳤다. 기무라는 <도스>라 불리는 수리검의 명수였다. 칼솜씨에 관한한 그를 따를 자가 조선에는 없었으며 일본 칼잡이 명수들이 찾아와 배우고 갈 정도였다 한다. 


수리검은 옛날 사무라이가 싸움터에서 백병전 때 또는 저격용으로 썼던 무기이다. 기무라는 李(이)씨 성을 지녔는데 원산 광명중학 졸업 후 원산관이란 극장주변에서 건달생활을 하다 일본에 건너가 야쿠자 세계에 몸을 담고 칼솜씨를 수련한 후 원산에 돌아와 깡패두목이 된 사내다. 


기무라는 금의환양한 김용환에게 “그까짓 당구는 그만치고 노래나 한 곡 불러봐라!” 라고 요구했다. 김용환은 자존심이 있어 들은 체도 안하고 무시한 채 공만 계속 쳤다.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한 기무라는 두고 보자며 씩씩거리고 돌아섰다. 당시 마침 칼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부하들도 없이 혼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용환은 악극단 동료들과 여러명이어서 세가 눌렸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칼잡이에게 칼이 없다는 것은 군인에게 총이 없다는 의미와 같기에 힘을 쓸수 없었던 것이다. 


기무라가 씩씩거리고 돌아가자 김용환은 ‘아차’싶었다. 깡패두목 여하를 떠나 기무라는 김용환의 몇 년 고향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찜찜한 기분에 걱정을 하다 자신의 고향친구이며 기무라의 직속부하인 오현을 생각해내고 그에게 중재를 부탁한다. 오현과 함께 기무라의 집을 찾았을 때 기무라는 이를 갈며 분해하고 있었다. 오현이 기무라에게 “형님! 용환이가 형님에게 사과를 하러왔어요!” 라고 하자 기무라는 이 기회에 김용환에게 겁을 주려 양손에 시퍼런 칼날을 뽑아들었다. 칼을 본 김용환은 사색이 된 채 벌벌 떨며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라고 하며 뒷걸을 쳤다. 겁을 주려고 기무라가 허공에 칼을 두 번 휘저어대자 운수 사납게도 오현은 기무라가 김용환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안돼요! 형님!” 하며 막아서면서 기무라의 양손을 잡는다는 것이 양손에 칼날을 쥐고 말았다.


 너무 세게 양손에 칼날을 잘못 잡아서 칼이 양손 뼈 끝 까지 파고들어 칼이 빠지지 않았다. 기무라가 평소대로 상대를 발로밀어서 칼을 빼냈으면 더 이상 큰일은 없었을터인데 그리하면 사랑하는 부하인 오현의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가 몽땅 손이 될 것을 우려해 주춤하고 있는데 이를 뒤에서 지켜보던 김용환은 두려움에 정신이 없었다. 기무라가 오현을 찌른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칼날을 조심스레 빼내려고 구부리고 있는 기무라, 자신을 중재하려던 오현 마저 살해하려 칼을 쓴 기무라가 정작 당사자인 자신을 결코 가만두지 않고 살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정신없는 김용환은 자신도 모르게 대문 앞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에서 장작개비를 뽑아들어 고개숙이고 있던 기무라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친 것은 순간이었다. 기무라는 켁 소리를 내며 꼬꾸라졌다. 


이때 잠시 기절한 기무라가 그대로 기절해 있었으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용환이 재빨리 도망을 쳤더라면 일이 더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진이 사나운 두 사나이에게는 그런 행운이 허용되지 않았다. 김용환은 자신을 중재하려다 칼을 맞은 오현을 그냥 내버려두고 내뺄 수가 없어 주춤하는 사이 불행하게도 잠시 기절했던 기무라가 꿈틀대며 일어서려하였다.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또 하나의 단도를 뽑아드는 것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눈앞에 두고 거의 발작상태에 있던 김용환은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때서야 오현이 박힌 칼을 빼내고 쓰러졌고 발 앞에 떨어진 피 묻은 칼을 본 김용환은 정신없이 그 칼을 주워들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기무라의 옆구리를 냅다 찔러버렸다. 급소를 맞은 기무라는 또 한번 켁 소리를 내며 꼬꾸라져버렸다. 


처음부터 김용환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단지 겁만 크게 주어 혼내주려던 기무라에게 갑자기 뛰어든 오현의 방해는 의외였고 하필이면 오현이 두 손으로 칼날을 움켜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였다. 평소대로 칼을 힘차게 빼냈으면 더 큰일이 없었겠지만 기무라는 자신의 심복동생이 조막손이 되게 할 수는 없어 조심스레 칼을 빼내다 김용환에게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일인데다가 이제 겨우 정신 차리고 일어서려는 자신에게 샌님에 불과한 김용환이 칼로 옆구리를 찌르리라고는 전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일이였다. 


일이 꼬이려니 모든 것이 꼬이고 꼬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깡패두목이자 조선최고의 칼잡이인 기무라를 칼로 찌른 김용환은 거의 발광상태가 되어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 후 김용환은 만주로 피신을 했고 기무라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조선최고의 칼잡이가 일개 가수에게 그것도 칼로 살해당한 것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일진 사나운 두 사내의 만남은 이런 비극을 맞고 말았다. 김용환은 결국 자수하였고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가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광복 전 해에는 <태평양악단>을 조직하여 전 조선을 누비고 다니며 인기를 모았고 광복 직후에는 <사대문을 열어라>를 작곡하여 미군환영을 준비하기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48년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기무라의 복수였을까?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