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길을 가다 우연히 정승아들을 얻다.

2022.08.18

     



             길을 가다 우연히 정승아들을 얻다. 


 우리나라 단양에는 천하명승으로 유명한 단양팔경이 있다. 필자도 예전에 여러 번 유람선을 타고 구경한바 있는데 정말 멋진 정경이었다. 단양팔경 중에서도 제일 멋있는 절경은 도담삼봉이다. 남한강이 굽이쳐 휘도는 곳에 바위봉우리 세 개가 서있는바 “딸만 셋을 둔 선비가 아들을 보기위해 첩을 얻어 어여뻐하자 본처가 노해서 딸을 품고 외면한 모습” 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은바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살았던 조선개국의 최고공신 삼봉정도전은 지금은 신단양이 된 도전리에서 태어났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경치 좋기로 유명한 이곳을 지나다가 인근 동리에 유명한 한 역술인을 만난다. 


역술인은 정운경의 사주팔자를 살펴본 뒤 “10년 뒤 우연히 길을 걷다 천한 밭에서 재상이 될 자식을 얻겠다.”고 예언하였다. 당시에는 이 말뜻을 짐작하지 못했다. 10년 후 정운경이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양반집여종이 강가에서 수수밭의 새를 쫓고 있었다. 그 여종의 미모가 절색이여서 정운경은 갑자기 일어나는 욕정을 참지 못해 그 여종을 강제로 쓰러뜨린 뒤 몸을 범하고 말았다. 욕정을 풀고 난 뒤 울고 있는 여종을 본 정운경은 ‘아차’ 싶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였다. 하여 “내 성은 정이다” 라고만 일러준 뒤 황급히 자리를 뜨고 말았다. 여종은 그 후 열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기가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봉화정씨인데 시조인 고조할아버지 정공미가 봉화현의 아전이었고 어미가 노비출신이여서 ‘한미한 집안출신’이라고 주위의 업신여김을 받았다.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하여 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三峰)인근 수수밭이므로 삼봉이라는 호를 얻었다. 그리하여 이곳이 훗날 도담삼봉으로 불리게 된다. 길을 걷다 천한 밭(천한 여인)에서 우연히 재상이 될 자식을 얻겠다는 역술인은 말은 훗날 실현되고 만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 1360년(공민왕9년)에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21세때인 1362년 진사시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375년(우왕1년)에 정도전은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파의 명나라에 대한 정책에 반대하며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관하의 거평부곡에 유배된다. 사람에게는 일생에 있어 운명의 전환점 즉 터닝포인트를 맞게 되는데 정도전에 있어 1383년은 이런 해였다. 


4년의 유배생활과 5년에 걸친 방랑생활 끝에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 함주 막사로 간 것이다. 가서보니 이성계의 군대는 기강이 엄격하고 대오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성계와 이런저런 대화 끝에 서로간의 마음이 통했고 평생 동지가 되기로 맹세한다. 정도전은 군영안의 노송에다가 백묵으로 <함영 소나무에 제하다>라는 시까지 쓴다. 1388년 드디어 역사적인 위화도회군이 일어난다. 명나라를 치라는 우왕의 명령에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한다. 첫째,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하며 두 번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한 일이고 세 번째, 원정을 틈타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으니 불가하며 넷째,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어 불가하다는 것이다. 


위화도회군은 명백한 구테타였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와 그 동료장수인 조민수는 정권을 잡게 되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책사로 활약하게 된다. 정도전은 다시 승승장구하다가 1392년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가 회복불능에 빠졌다고 오판한 정몽주, 김진양 일파가 정도전을 제거하기위해 상소를 올려 정도전을 제거하려하였다. 얼마 전 TV 사극드라마에서 보니 정도전과 정몽주가 끝까지 우정을 유지한 것으로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정몽주가 정도전을 죽이려고 함으로써 이들의 30년 우정은 이때 끝장나고 만 것이다. 결국 정도전은 봉화로 유배되었고 정몽주는 끈질기게 상소를 올려 유배지에 있는 정도전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정몽주는 측근인 김귀련, 이반 등에게 정도전의 귀향지로가서 국문을 하면서 고문을 심하게 하여 죽여버리라는 밀명을 내린다. 죽을 위기에 처한 정도전의 운명은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하게 된다. 1392년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함으로써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같은 해 6월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났고 조정은 다시 이성계일파에게 장악된다. 세의 불리함을 느낀 공양양은 치사하게도 왕의 체면도 잊고 이성계를 찾아가 문병하면서 이성계와 동맹을 맺자고 먼저 제의한다. 아무튼 국가도 아닌 임금과 신하 간에 이상망칙한 동맹이 맺어지기는 했으나 한 달 뒤 공양왕은 폐위된다. 1392년 7월 17일 정도전은 조준,남은 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조선이 개국된다. 


폐위된 공양왕은 왕비,세자와 함께 원주로 쫓겨났으며 간성으로 옮겨진 뒤 공양군에 봉해진다. 그 뒤 1394년 태조가 보낸 정남진 등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사사되고 만다. 조선건국 뒤 정도전의 야망은 커져만 간다. 사병세력을 거느린 왕자들의 세력을 꺾기위해 왕자들을 각 도의 절제사로 보내 군대를 관리케 한다는 명분으로 사병을 모두 해체했으며 방원은 전라도 방번은 동북면으로 보내려고 음모를 꾸민다. 방원은 마침내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고 판단, 방원의 아내가 몰래 감추어 둔 무기를 꺼내 정도전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정안군 방원 앞에 끌려온 정도전은 “옛날에도 공이 나를 살려 주었으니 오늘도 한 번만 살려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하며 무릎 꿇고 빌고 또 빌면서 목숨을 애원했다. 하지만 단번에 거절당한 채 목이 베이고 말았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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