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범한 부인 -시원시원한 이혼-
꽤나 오래전 이야기다. 공 선생께서 드디어 출가(?)하셨다. 수 십 년 동안 그토록 원했지만 현실여건 때문에 미뤄왔던 일이다. 오래전부터 필자와 상담을 할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지 못함을 한탄해오던 이다. 공 선생은 한국에서 현대그룹에 근무하던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대학 재학시절 부터 선사상(仙思想)에 관심이 많았고 도가(道家)적인 기풍에 매료 되어서 이쪽과 관련된 독서도 많이 하여 대화를 나눠보니 꽤나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공 선생이 이곳 미국과 인연이 된 것은 LA지사 주재원으로 파견근무를 시작 하면서 부터다. 남들은 서로 못가 안달인 자리를 공 선생은 별로 탐탐치 않았다 한다. 어떤 좋지 못한 예감이 있었나 보다. 하지만 회사의 명령이니 어쩔 수없이 오게 되었고 부인과 외동딸도 곧 뒤따라와 오렌지카운티 부에나 팍 에 거처가 정해졌다.
공 선생은 업무 실적이 좋아 늘 승진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었고 활달한 성격의 부인이 부업으로 이런저런 가게를 운영하여 경제적으로는 늘 풍족하였건만 세월이 갈수록 이런 것들이 모두 하찮게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부인과 딸은 이곳 미국생활이 너무너무 좋았고 파견근무가 만기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연장근무 신청을 할 것을 공 선생에게 강요했다. 마지못해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장근무 신청은 계속 받아들여졌다. 회사에서도 이곳 미국지사에 공 선생이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어서 인듯했다. 하지만 공 선생은 이곳 미국생활이 영 탐탁치가 않았다. 이러다보니 부인과 다툼이 잦아졌다. 부인과의 관계가 냉랭해 졌을 때 어느 날 부인이 갑자기 이혼을 요구해왔다.
서로 맞지 않는 사람끼리 시간낭비 하며 으르렁 거리지 말고 깨끗하게(?) 헤어지자는 요구였다. 평소에 성격이 활달하고 대범했던 부인은 세심하고 치밀하며 다소 우울한 남편의 성격이 늘 못마땅했었다고 시원시원하게 이유를 대며 딸아이는 공 선생이 원하면 공 선생이 키우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맡아도 좋으니 아이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며 공선생의 부담까지 덜어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얼마 전에 대학재학 시절 사귀었던 남학생을 우연히 이곳 LA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미혼이었고 자신이 유부녀에 딸까지 두고 있는 것까지 다 말했음에도 그런 것 게의 치 않을 테니 다시 시작해 보자고 진지하게 요구해왔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부녀로서 손톱만치도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부인의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있는데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한 뒤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훌쩍 떠났다. 평소 성격이 원체 대범하고 시원시원 해서 ‘여장부’소리를 듣던 아내다운 처사였지만 소심하고 예민하면서 다소 신경질적인 공 선생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최근 들어 자신이 다소 신경질을 자주 부리곤 했지만 와이프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과 결혼하기 전 사귀었던 남자와 새 출발을 고려하여 이렇게 나오자 그 배신감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공선생과 부인은 관심사나 생활방식이 판이했다한다. 휴일이면 공 선생은 집에서 조용히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독서, 사색, 명상 등을 즐기며 휴식하길 원했고 활달한 성격의 부인은 필드에 나가 골프를 치거나 여기저기 바삐 쇼핑 또는 지인들과 만나 수다를 떨며 맛있는 음식 사먹기를 원했다. 정적인 사람과 동적인 사람의 차이였다.
부부간에 대화도 잘 되지 않았다. 공 선생은 말수도 적고 사색적 이어서 자기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편이였으나 부인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감동하는 성격이여서 자기주장을 큰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 일쑤여서 한마디로 서로의 코드가 맞지 않았다. 아이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서로는 못마땅해 했다. 외동딸인 관계로 지나친 사랑과 관심을 받아 다소 버릇없는 딸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공 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이해할 수 있게 조근 조근 설명하며 달래면서 야단치는 스타일 이었고 다혈질인 부인은 큰소리로 눈물이 쏙 빠지게 격하게 야단치는 스타일 이었다. 딸은 이성적이고 차분한 아빠도 좋아했으나 화통한 성격의 엄마를 더 따랐다.
호되게 야단을 치고 난 다음에는 화끈하게 딸애가 원하는 물건을 선물 하거나 데리고 나가 외식하는 등 뒤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일방적으로 공 선생에게 통고를 하고 한국에 나갔던 부인은 근 한 달 만에 돌아와 공 선생을 채근하기 시작했다. 구차스럽게 이런저런 이유 대며 시간 끌지 말고 화끈하고 깨끗하게(?) 끝내자는 거였다. 공 선생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 생각도 해야지 어떻게 우리입장만 내세워 아이에게 가정을 빼앗는단 말인가?” 라고 하자 부인 왈 “OO이는 OO이의 인생이 있는 거고 나는 나의 인생이 있는 거야! OO이의 인생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하라는 거야? 걱정 하지 마. OO이도 ‘엄마 아빠가 이혼 하는 건 싫지만 그렇게 해서 엄마가 행복해 진다면 그래도 좋아’ 라고 했어. OO이도 이정도로 다 컸 다구 그러니 애 핑계대고 시간 끌 생각은 말 어!
처음부터 이야기 했잖아? OO이는 당신이 원하면 당신이 키워! 나는 OO이를 당신이 맡던 내가 맡던 아무 상관없어. 당신이 워낙 세심한 사람이니까 당신이 키우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몰라!” 아주 시원시원한 답변이었다. 딸아이 에게 누구와 살고 싶냐 고 물으니 엄마와 살겠다고 했다. 재산분할 문제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처갓집이 워낙 여유가 있는 집안이고 처의 성격 또한 돈 문제로 이러쿵 저러쿵 할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재산을 반으로 나누자고 하니 부인 말이 “당신이 더 가져도 상관없으니까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 라고 시원히 답해주었다. 문제 거리가 없으니 너무도 손쉽고 싱거운 이혼이 되어 어딘가 허망하고 쓸쓸했다 한다.
공 선생은 가방 싸들고 나와 호텔에서 몇 달을 지내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난 뒤 필자를 찾았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이혼을 하고나니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평소에 꿈꾸어 왔던 생활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팔에 가서 조그만 식당이나 하나 운영 하면서 실컷 산이나 타야겠습니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 수행하는 요기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 공부도 실컷 해보고 싶습니다. 제 평생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혹시 미국에 오게 되면 잊지 않고 꼭 선생님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그동안 많은 충고 고마웠습니다!” 훌훌 털고 떠나는 공 선생이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허전해 지기도 했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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