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투리가 맺어준 인연 __마을풍수__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황전동(黃田洞)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황전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의성(義城)김씨 선조는 송산공(松山公)이다. 의성김씨는 신라의 마지막왕인 56대 경순왕과 고려태조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 사이의 소생에서 시작됐다. 송산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 벼슬길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 훈련원봉사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이분이 황전에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송산공이 15세 때 인 1568년 봄 어느 날 노복 2명을 거느리고 매를 이용한 꿩 사냥에 나섰다. 목적지는 구봉산이었다.
황전마을 어구쯤 들어섰을 때 마침 까투리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공은 얼른 매를 날렸다. 매는 쏜살같이 치솟아 까투리를 덮쳤다. 까투리는 절박한 비명을 지르며 겨우 매의 발톱을 아슬아슬 벗어나 다급한 나머지 황전마을 복판에 있는 큰집 부엌으로 날아들었다. 그런데 마침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어떤 아리따운 규수가 까투리의 위급함을 알고는 덥석 안아 치마폭에 감추어 주는 것이 아닌가! 당시 이 마을에는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집성촌을 이루어 대대손손 살고 있었다. 까투리가 날아든 집은 영양 남씨의 종손인 남구수 진사댁 이었고 그 아리따운 규수는 남진사의 여식이었다. 송산공은 다잡은 까투리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규수가 까투리를 절로 얻었으니 좋아하겠군!” 이라고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가만히 보니 매가 까투리의 행방을 잃고 우왕좌왕하다 포기하고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 규수는 까투리를 안전하게 다시 날려 보냈다.
공은 규수의 아름다움과 심성이 인자함에 감탄했다. “짐승에게도 저리 인자함을 베푸는 고결한 인품에 모습마저 저리 아름다우니 장차 자식을 두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바른 자식으로 능히 키워낼 처자로다!” 공은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자초지정을 고하고 청혼해 줄 것을 간청했다. 사연을 들은 부모도 쾌히 승낙하고 중매쟁이를 보내 청혼을 하게 하였다. 까투리가 맺어준 인연이었다.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다가 절을 한다’ 고 공은 벼슬을 그만둔 후 처가인 황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이후 남씨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한 집 두 집 타지로 떠나는 가운데 30년의 세월 후에는 결국 의성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그런데 송산공이 이곳에 정착한 후 해마다 재앙이 들어 피해가 막심했다. 어떤 해에는 가뭄이 들어 농사를 죄다 망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또 어떤 해에는 돌림병이 돌아 집집마다 병자가 속출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해에는 호랑이가 마을에 침범하여 아이를 물어가는 등 한 해도 맘 편히 넘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버리고 떠나야겠다고 마을 사람들의 공론이 넘칠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유명한 풍수가가 하룻밤 이 마을에 묵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하소연하며 어떤 비책이 없겠는가를 물었다. 풍수가는 다음 날 마을의 지형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이 마을은 명산인 소태산(小太山)을 느슨히 등지고 저 멀리 학가산을 마주보는 위치였는데 마을 풍수상 물과 나무가 부족한 지세였다. 풍수가 왈 “학가산은 암벽 산으로 火요, 사는 사람들 성은 김씨이니 金이요, 황전을 말 그대로 누른 밭이니 土올씨다. 火金土는 갖추었으나 水와 木이 없으니 오행이 상통하지 못해 기(氣)가 막혀있는 형세요! 마을에 큰 연못을 파서 물의기운을 보충해주고 동구 밖에 나무를 심어서 숲을 조성하면 木의 기운이 보충되니 오행이 상생(相生)하여 마을에 기가 잘 통할 것이니 능히 재앙을 막고 자손대대로 번성할 수 있을 거외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명 풍수가의 말을 따라 마을에 큰 연못을 파고 연을 길렀으며 마을 남쪽비탈에 소나무, 느티나무, 오리나무 등을 많이 심어 숲을 만들었다. 그 후 황전은 재앙이 사라지고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황전의 모습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하고 그 한가운데 살포시 앉아있는 작은 섬에는 노송 한그루가 가지를 드리운 채 그윽한 그늘을 선물하고 있다. 못가에는 황전의 상징인 도암 정자가 제비나래 같은 추녀를 가뿐히 치켜들고 있다. 이 정자는 입향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704년에 건립되어 이후 사림의 석학지사들이 모여 학술을 논하고 나라 정사를 공론했던 곳이다. 동구 밖에는 이 마을을 지키는 초병인 양 커다란 기둥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다. 포개놓은 듯 두 마디로 된 동쪽 기둥 바위에는 깊게 패인 자국이 있는바 전하는 말로는 옛날 어느 장수의 발자국이라고 한다.
마을 앞 구봉산에는 기슭에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동편으로는 달봉산이 솟아 있다. 황전에는 마을 셋이 동서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데 중심에는 골마라는 마을이 이곳에서 동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새터마을, 서편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면 선녀골 이라는 마을이 있다. 아무튼 풍수가의 충고대로 따른 결과 이 후 이 마을은 아무 탈 없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렇듯 어떤 장소라도 음과 양, 목화토금수 오행이 통해야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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