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ilica of San Vitale 산 비탈레 성당 라벤나는 놀라운 도시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보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라벤나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모두 8곳이나 있다. 첫 번째는 지난 번에 소개한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Mausoleum of Galla Placidia) (c. 430), 두 번째는 네오니아노 세례당(Baptistry of Neon) (c. 430), 세 번째는 아리안 세례당(Arian Baptistry (c. 500), 네 번째는 대주교의 예배당(Archbishop's Chapel (c. 500), 다섯 번째는 산 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Basilica of Sant'Apollinare Nuovo (c. 500), 여섯 번째는 데오도릭 황제의 영묘(Mausoleum of Theoderic (520,) 일곱 번째는 산 비탈레 성당(Basilica of San Vitale) (548), 여덟 번째는 산 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Basilica of Sant'Apollinare in Classe) (c. 549)이다, 이 문화유산들은 모두 1500년 전인 5세기 - 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모자이크는 “영구히 보존될 그림을 그리는 진정한 방법”이라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정의한 바 있다. 정말 그렇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모자이크의 아름다움은 라벤나에서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서기 526- 548년 사이에 지은 산 비탈레 성당도 예외는 아니다. 525년 교황을 만나고 온 주교 에클레시우스는 성인 비탈레가 순교한 땅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성당 건축에 전적으로 재정 지원을 한 사람은 은행가인 율리아누스 아르겐타리우스. 아르겐타리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라벤나에 파견한 특사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에서는 거대한 외관과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성 소피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Sofia)이 건축 중에 있었다. 537년 대성당이 완공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렇게 외친다, ‘솔로몬 왕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그러나 1453년 이슬람 세력이 몰려 오자 대성당 내부는 파괴되고 모자이크는 모두 석회칠로 덮히게 됐다. 이제 초기 기독교 미술의 보물들은 라벤나에 가야지만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산 비탈레 성당의 내부는 은은하게 빛나는 녹색, 금색, 주황색 등의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하지만 돔(Cupola)은 18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로 장식됐다. 3개의 창문은 성부, 성자, 성령의 3위일체를 말한다. 그 위에는 보라색 옷을 입고 계신 예수님이 우주 위에 있고 아래에는 에덴에서 발원한 4개의 강이 흐른다. 2명의 천사 옆으로는 왼쪽이 성인 비탈레, 오른쪽이 당시 대주교였던 에클레시우스다. 에클레시우스는 산 비탈레 성당의 모형을 제물로 바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왕이신 예수님은 오른손에는 왕관을 왼 손에는 일곱개의 봉인이 있는 요한계시록을 들고 있다, 다시 3개의 창문을 지나면 천장에는 어린양이 원형 중앙에 그려져 있다. 그 위로는 예수님(수염이 있는)이 중앙에 계시고 열두 제자가 양쪽으로 여섯 명씩 나뉘어져 있다. 왼쪽의 아벨은 어린양(창 4장 4절)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제사다. 오른쪽의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창 14장 18절)로 아브라함을 축복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왼쪽 벽 뤼네트에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겪은 두 사건을 모자이크로 그린 장면이 있다. 중앙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하는 세 명의 나그네와 장막 문 뒤에 서있는 사라의 모습(왼쪽)이다. 사라는 당시 경수 끊어진 늙은 몸이었는데 아들을 낳게 된다는 나그네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웃는다(창 18장). 오른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 내리치려고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번제로 드릴 수양을 벌써 준비해 놓고 계셨다(창 22장). 그 외에도 모자이크 중에는 예레미아와 모세,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다. 산 비탈레 성당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모자이크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의 모습이다. 왕관(Diadem)과 팔루다멘튬(Paludamentum)을 걸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왼쪽에는 막시미아누스 대주교 등 교회 사람들을, 오른쪽에는 참모와 무장한 친위병들을 대동하여 성체성사를 위해 준비중에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진주 장식의 왕관을 쓴 황후도 시녀들과 교회 성직자들을 대동하고 포도주잔(Calix)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두 사람에게는 후광까지 그려 넣어 비잔틴 제국의 위엄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실제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대제 칭호까지 받은 왕으로 천 년의 비잔틴 제국 전성기를 이룬 황제다. 그가 한 일은 옛 로마 영토 회복, 중국 양잠법으로 견직공업 발전, 로마법 대전 편찬, 성 소피아 대성당 건축 등이 있다. 테오도르 황후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만난 아주 천민한 사람이었다. 일설에는 그녀가 무희 또는 창녀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로원 신분의 유스티니아누스는 미천한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지만 법까지 바꾸며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그러자 테오도라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잔틴 제국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해나간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폭동이 확대되어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다. 군중들이 황궁으로 몰려 오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다. 이에 테오도르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린 황제는 벨리사리우스등 장군을 불러 폭도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테오도라 황후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 위대한 예술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라벤나에 남긴 두 사람. 1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흔적은 희미해 졌다. 그러나 당당했던 두 사람의 모습은 이곳에 고스란히 남았다. 라벤나가 놀라운 도시가 된 옛이야기다. 글, 사진: 곽노은 *표시의 이미지(2장)는 구*표시의 이미지(2장)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