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라벤나-1)

2018.08.13



 
 

Mausoleo di Galla Placidia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 
 
라벤나-1
 


유럽에서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운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라벤나에 위치해 있는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Mausoleum of Galla Placidia)다.




그리스식 십자가(가로 세로가 같음) 모양의 무덤은 AD 430 년에 지은 것이다.
흙벽돌로 평범하게 지은 외부와는 달리 무덤 안은 들어 서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된다.




1600년 전 만든 것이라 믿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너무나 찬란하다.




반 고흐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나? 하늘의 별들이 천장 속에 무수히 그려져 있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석관(Sarcophagus) 위로는 화형 당하는 성 라우렌시오의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혹자는 모자이크의 주인공은 성 라우렌시오가 아니라 ‘성 빈첸치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세기 말 사라고사에서 태어난 성 빈첸치오는 황제에게 잘 보이려는
다치아노 총독에게 큰 박해를 받았던 성인이다.
총독은 석쇠에 그를 올려 놓고 형벌을 가하는가 하면..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를 바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나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이후에도 총독은 끝까지 이 거룩한 순교자를 욕되게 하기 위해 그 유해를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파도로 인해 시신은 육지로 휩쓸려 오고 신자들은 찬미속에 성인을 정중하게 매장했다.
이 모자이크의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성인의 옷이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실감나게 그린 것이다.
바퀴 달린 그릴의 모습도 당시 고문기구의 확실성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발렌티아누스 3세 석관 위로는 두 마리의 숫사슴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시편 42장 1절의 성경 말씀을 라벤나의 예술가들이 모자이크로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대리석 벽과 천장 모자이크 맨 아래의 뤼네트(Lunette)에는 선한 목자 예수님과 양들의 모자이크가 있다.
뤼네트는 천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 만든 반달 모양의 창 또는 공간을 말한다.




십자가를 들고 바위에 앉은 목자는 예수님이 선한 목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 손에는 십자가 다른 한 손에는 양을 쓰다듬고 있는 예수님의 움직임도 아주 자연스럽다.
수염없는 예수님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상상했던 머리가 긴 젊은 예수님의 모습이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아주 작지만 사진 촬영과 감상에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묘는 5분 밖에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무덤)을 남긴 갈라 플라치디아라는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딸로 태어나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에서 자랐다.
자랄 때의 별명은 ‘메디올라눔에서 가장 고귀한 소녀’였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이복오빠가 있었다.
큰오빠는 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아르카디우스,
작은 오빠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다.




*서고트족의 알라리크(Alaric I)가 로마를 침공한 것은 AD 410년.
서고트족은 게르만족의 일파로 지금의 스페인과 프랑스 지역에 있던 민족이다.
당시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 있었고 갈라 플라치디아는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로마를 함락한 알라리크는 사흘동안 도시를 약탈한 후 인질들을 끌고 남쪽으로 향하게 된다.
인질들 중에는 갈라 플라치디아도 있었다.
그러나 알라리크은 코센차라는 곳에서 수난으로 급사 게르만의 풍습대로 장사를 지내게 된다.




알라리크의 후계자로 추대된 사람은 그의 처남인 아타울프(Ataulf).
그런데 아타울프(당시 36세)는 갈라 플라치디아(당시 22세)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414년 결혼식을 올리고 그녀는 아타울프의 아내가 됐으며 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들은 유아시절 사망하고 얼마 후에는 아타울프 마저 측근에 의해 피격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타울프의 유언에 의해 갈라 플라치디아는 로마제국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녀는 후에 콘스탄티우스 장군과 결혼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발렌티아티아누스 3세가 태어났다.
바로 425년(당시 6세)부터 455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한 발렌티아누스 황제(Valentinian III)다.




이때부터 갈라 플라치디아는 모후(母后)의 자격으로 서로마를 다스리는 섭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12년간의 섭정 기간 중 교회를 건축하고 라벤나 예술을 세계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는 그녀가 설립한 산타 크로체 성당과 연결돼 지은 자신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산타 크로체 성당은 파괴되고 현재는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만 남았다.


글, 사진: 곽노은


 



*Galla Placidia




*표시의 이미지(2장)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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