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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경제

국제 교역에서 자유와 보호의 본질

2022.09.03

舊約聖經(구약성경)의 출애급기를 읽으면 이런 말이 있다. 에집트 왕의 서열에 대기중이던 모세가 자기가 유태인의 피를 타고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어느날, 에집트의 감독관이 유태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를 죽이고 결국 목숨을 구하여 피신하기 40년 만에 여호와의 부름에 응하여 다시 에집트로 돌아가서 자기 백성을 이끌고 그 노예의 땅을 등졌던 이야기가 쓰여있다. 


처음 따라나선 군중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하는 동안에 갈증과 허기를 견디다 못해 그를 죽이려고 까지 하였으나, 야외가 모세에게 명하여 바위를 쳐서 샘물이 솟게 했고, 밤사이에 떨어진 '만나'라는 먹을 것을 땅에서 줍게 했었다. 그러면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낯에서 구름기둥을 바라보면서 결국 요단강가로 까지 이들의 유랑민들을 안내했었다. 


사막에 무슨 먹을 것이 충분했겠나? 그러나 '모세'가 명하기를 "자기의 하루치" 만을 줍게 했었다. 어떤이가 욕심을 내어 더 많이 주었던 것은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썩어버렸다. 이런 일이 있었던 때가 기원前 1230여년(1230 BC)이었다. 3,00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모세'가 禁(금)했던 명령을 어기면서 만나를 줏어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物物交換(물물교환)을 해왔다. 인류는 자기 먹을 것과 입을 옷을 만들어야 했고, 쓰고 남는 것은 시장에서 남의 것과 바꿔야 했었다. 


그런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거래의 중간 매개물로 貨幣(화폐)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처음에 鐵(철)부치로 시작된 것이 金(금)과 銀(은)으로 바뀌더니 나랏님이 보증한다는 "약속의 지폐"만으로 충분하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왜냐? 王(왕)은 자기가 원하면 수시로 얼마든지 세금을 걷우어들이니 그 사람만큼 신용이 좋은 사람이 그 나라 안에 어디 있은가? 이것이 "信用의 證書(신용의 증서)"로써 종이화폐가 시작되게 되었고, 이런 증서를 제일 먼저 깨닯고 실천에 옮긴 사람이 '징기스칸'의 손자였던 '후릴라이 칸'이란 元(원)나라의 황제였다. 


그는 몽고에서 말 타던 사람들의 후예였는데, 말이란 기동력과 활 잘 쏘았던 덕택에 중국의 中原(중원)뿐 아니라 전세계 거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학식도 많았고 훌륭한 정치를 했으면서, 중국이 古來(고래)로 자랑하던 모든 값진 것을 자기의 도장이 찍힌 종이장과 바꾸었고 이로써 정복된 중국사람들의 遺産(유산)을 무진장 뫃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쉬운 장사가 어디 있는가?


문제는 물건이나 어떤 '서비스'를 創出(창출:만들어 냄)하려면 反對給付(반대급부:댓가를 지불함)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짜의 '만나'가 아니란 말이다. 유치한 手工(수공)의 농업과 생산시절에는 이런 남의 수고를 대변하는 貨幣를 누군가가 들고 와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사가기 때문에 滯貨(체화:물건이 남아돈다) 즉 안팔린다고 파리를 날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産業革命(산업혁명) 이후에는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장바닥에 나와 있는 물건을 다 소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항상 재고가 남아돌기 시작했다. 생산업자나 도-소매상들은 이윤을 붙여서 남에게 팔수가 없게 됨으로 공장이 원활히 가동될 이유가 없게 됐고, 상인들은 물건을 더 적게 내놓아서 못 파는 물건이 없도록 재고를 점점 줄이게 되었다. 생산과 상업활동을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들 이렇게 줄이다 보면 점점 더 가난해 지지 않겠나? 


다시 말하면 개똥이는 공장에서 일하고, 그 여편네는 남의 농장에서 팟단을 매서 얼마의 품삯을 받았다. 그 중의 일부를 떼어서 아이들 옷도 사 입히고 자기들 고무신을 샀었다. 그러나 애들이 학교를 가려면 훈장에게 사례를 해야 하고, 가을에는 새 벳단으로 지붕도 새로 해야했기 때문에, 벌어들인 돈을 다 쓸 수가 없었다. 개똥이만 그런 생각을 했나? 쇠똥이는 연탄공장에서 일했는데, 이 사람도 똑 같은 이유로 일부의 월급을 남겨서 비오는 날을 대비하게 되었다.


모두들 이렇게 자기의 수입의 일부를 떼어서 저축하다가 보니까,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들이 시장에 진천으로 깔리게 됐으나 구매자의 소비는 점점 줄어들거나 더 증가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들 돈을 꿍쳐 놓다가 보니, 처음에 $100불어치 월급에서 $70 불만 시장에서 남의 물건을 사주게 되는 현상이 강해졌다. 그 $100불 어치의 상품이 다 팔려야 공장이 다시 돌아가고 거기서 일하던 사람이 또 $100불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데 $70 어치만 사람들이 사주면 그 공장은 $70 어치만 만들어야 체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생산업자와 '서비스'종사자들이 지출을 줄이다가 보니까 그 전체를 대변하는 國家經濟(국가경제)는 위축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다. 이것을 不景氣(불경기)라 부른다. 경제의 기운이 빠졌다는 얘기다.


생산된 것이 전부 소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국가경제의 전체로 볼때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렇게 나쁜 쪽으로만 경제가 돌고 돌면, 누가 이것을 바로 잡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모두들 잘 살게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경기가 점점 둔화되어 결국은 불경기를 맞아서 다들 우는 소리를 해야하는 이유가 무었인가를 묻게 되었다.


John Maynard Keynes (1883~1946)란 경제학자가 "저축이 소비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비를 증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물으면서, 산업활동에 종사하는 모두에게 세금을 경감해서 생산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공장이 노동자들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된다. 소비자가 저축한 금액 만큼을 정부가 메꾸어 주고, 이자율을 낮춰서 더 많은 은행돈을 쓰게 함으로써 생산된 모든 것을 전부 소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생산된 것은 반드시 소비돼야 한다"는 정책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이 유럽에서 한창일때 미국은 이들에게 전쟁물자를 팔아 먹으면서 잘 나가고 있었다. 막판에 미국도 말려들기는 했지만 생산공장이 파괴되거나 항만과 도로가 유실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막대한 전쟁산업과 연관된 공장들에서 체화를 하고 있음에도 금융시장은 호경기를 노래하고 있다가 드디어 大恐慌(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의 증조가 1928년 부터 일기 시작하더니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에서 왕창 주식이 폭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공장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았고 경기는 후퇴를 거듭하다가 1932년까지 미국 노동자의 25%가 실직하고 길거리를 헤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마침 F.D. Roosevelt 대통령의 행정부가 "Fear Itself를 겁낸다"는 연설과 함께 Keynes의 이론을 적용하여 막대한 국가의 부채로, 과감한 적자예산으로 노동자와 공장을 살리는 정책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교정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막혔던 경제가 되살아 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6.25사변으로 그동안에 체화되어 왔던 미국의 재고가 마지막으로 처리가 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국가가 어느 정도로 국가경제의 움직임에 간여해야 하는 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나친 통화의 유통은 인풀레를 불러 일으켰고, 시중의 물가를 천정부지로 올려 놓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하여 시중금리와 세금을 더 올려서 소비를 줄이는 난리를 쳐야 했다. 이로써 경제가 잡히는가 하면, 또다시 인풀레가 들이 닥치곤 했다. 이러한 '경제널뛰기'의 오르내림이 간단없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국가는 모든 경제활동에 간여하지 말고 원래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의 자율조정에 맡겨야 한다는 이론이 1970년 대에 등장했다. '쉬카고' 대학의 Milton Friedman란 경제학자가 "자유경제이론"을 주창하면서 그동안 지켜온 FDR 이후의 Keynes的인 경제정책에서 모든 경제규제을 급선회하는 정책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가 이런 이론으로 해서 경제학 노벨상을 받았다.


禪涅槃

3/1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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