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역술인 池和(지화)

2021.12.08

 



                          역술인 池和(지화) 


 池和(지화) 는 조선조 건국초기에 활동했던 역술가이다. 지화는 일찍이 역술을 공부하여 용하다고 소문이나 태종 때부터 궁궐을 출입하며 왕족들을 상대로 상담을 하였다. 주로 궁궐의 왕자나 공주들의 사주팔자를 감정하였고 왕족의 혼사에 있어 궁합(혼인점)을 주로 보았다. 왕실에 혼사가 있으면 일정나이 이상의 청춘 남녀에게는 금혼령이 내려졌다. 이때 池和(지화)가 바빠지는 시기였다. 지화는 젊은 혼인대상자가 있는 사대부가를 드나들며 사주팔자를 물어 이를 혼인할 예정인 왕자나 공주 사주팔자와 대조하여 궁합을 보아야 했기에 그러했다. 


태종은 마흔 살 가까이 되어서 얻은 막내아들 성녕 대군을 매우 이뻐했다. 그런데 성녕이 갑자기 홍역을 앓아 죽을 지경에 빠지자 매우 초조했다. 해서 전국에 유명하다는 무당이나 역술인을 죄다 불러 모았다. 거의 모든 이들이 ‘吉’을 택했다. 즉 성녕이 회복된다는 뜻이다. 오직 한사람만이 답을 내놓지 않고 쩔쩔매고 있었다. 지화였다. 지화가 뽑은 쾌는 凶이었다. 즉 성녕이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쾌였다. 왕자에 대해 凶言(흉언)을 할 수 없어 쩔쩔 메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주역에도 일가견이 있어 지화의 쾌를 대신 해석해 올렸다. 결국 성녕 대군은 어린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조정에서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회복한다고 점친 이들을 모두 처벌하라고 난리였다. 


허나 태종은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처벌한다면 이 사실이 사초에 모두 기록될 것이고, 일국의 군주가 점쟁이들에게 놀아난 꼴이 되기에 그랬고, 충녕대군 또한 이 점사에 관여했기에 누가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때부터 시장 통에서 유명하던 지화가 출세하여 궁궐을 드나들게 된 계기가 되었고 세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지화는 왕족과 사대부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이제는 시시한 평민이나 하급관리들은 상대하지도 않았다. 복채도 무척이나 후해졌다. 그만큼 유명해지고 재산도 늘어났다. 그럴수록 자중해야 하는데 교만해졌다. 필자의 안티 중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 지화만큼 유명 해지지는 못했지만 필자 또한 겸손하고 자중하려 노력을 무척이나 하고 있다. 


아무튼 지화는 점점 더 거만해졌는데 상대하는 이들이 왕족이나 고관대작이었으니 자신도 모르게 그리 되었다. 이런 이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기뻐하거나 두려워하니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자신이 그들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세종대왕이 지화에게 검교 한성소윤(지금의 서울시 부시장)이라는 벼슬까지 내리자 지화의 교만함은 극에 달했다. 세종이 어느 날 지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환관을 보냈다. 그런데 지화가 마침 집에 없었다. 환관은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金閏(김윤)이라는 선비 집에서 취해있는 지화를 발견했다. 예나 지금이나 高名(고명)한 역술인들 중에는 유독 술꾼이 많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다보며 별별 인사를 다 보게 되고,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데 술만 한 것이 없기에 그러했다. 술은 예민해진 머리를 쉬게 하는데 특효였기 때문이다. 


환관이 왕명을 전하자 지화는 거만하게 말했다. “오늘은 술에 취해 점 쾌를 잡을 수가 없다” 간덩이가 부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세종은 노발대발했다. 그보다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평소 지화의 건방진 행세에 분개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옛정을 생각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춥고 추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런 오지 중 오지에 귀향을 갈 경우 거의 모두가 혹독한 환경 때문에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데 천만 다행으로 귀향이 풀려 한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돌아와서 다시금 왕족과 고관대작을 상담했다. 한번 혼 줄이 나서 매우 겸손해지기는 했으나 ‘천성은 개 못 준다’고 슬슬 옛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사후 병약한 문종이 왕위를 이었고 세자인 단종은 너무 어려 정국이 뒤숭숭했다. 후에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아우 안평대군이 서로의 세력을 키웠다. 시화에 능하고 사람이 좋은 안평대군이 더 인기가 있었다. 이때 어떤 이가 와서 지화를 안평대군 저로 모셔갔다. 위태롭고 예민한 시기에 앞날을 알고 싶어서였다. 지화는 쾌를 뽑았다. 안평대군이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쾌였다. 일생일대의 잘못된 쾌를 짚은 것이다. 이때부터 안평대군의 일파가 되어 이런저런 모사를 꾸몄다. 안평대군 댁에 다녀오던 길에 한번은 길에서 수양대군을 만났다. 수양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고 지화는 거짓말을 했다. 투병 중이던 “정의공주(세종의 둘째 딸)댁에 병 점을 치러갔으나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셔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라고 했다. 이어서 수양은 공주가 어찌 되겠냐고 물었다. 지화는 “올 7월에 액이 일겁니다. 라고 답했다. 


수양이 의심을 품고 공주 댁에 가보니 공주는 병이 거의 다 나았고 지화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뒷조사를 해보니 역시 안평대군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안평대군에게 선수를 뺏기지 않으려고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 등등을 제거해 버렸다. 지화는 1453년 (단종 1년) 초겨울 어느 날 망나니 칼춤 앞에 목을 내미는 신세가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말에 ‘중이 지 머리 못 깎고 예언가가 지 앞날 예언 못 한다’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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