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은 호탕男의 유람
방 선생은 운이 아주 좋은 사내였다. 위인이 허랑방탕하고 어느 일 하나 끝까지 이루어낸 것이 없고 평생 변변한 직업하나 없었으나 평생 의식주가 풍족했다. 방 선생은 천안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의 여덟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라고는 하나 ‘송곳하나 꽂을 땅도 없는 가난뱅이’였다. 이 마을 저 마을 일손이 필요한 집을 찾아다니며 품팔이를 하며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날품팔이 농부였다. 이러다보니 집에는 먹거리가 늘 부족하여 쫄쫄 굶는 날이 배부른 날보다 훨씬 많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방 선생은 열세 살 때 먼 일가 중 자식이 없는 친척집에 양자로 입적되었다. 양자라고는 하지만 늘 고된 신역에 시달리는 머슴살이와 다름없었다. 학교도 보내주지 않고 뼈가 빠지게 농사일만 도와야했다. 양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양자를 들이기는 했으나 방 선생을 늘 원수 대하듯 했다. 일은 그리 고되게 시키면서 먹는 것이 아까 와 늘 눈치를 주었다. 춥고 배고픈 것은 고향집에 있을 때나 양자로 가서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던 와중에 양어머니가 이웃집 노총각과 눈이 맞아 서방질을 하다 양아버지에게 들켜 죽도록 매를 맞은 뒤 집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있었다. 이제는 홀 애비가 된 양아버지와 방 선생 두 사람만 집에 남아 묵묵히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가뜩이나 성정이 괄괄했던 양아버지는 이런 처지가 된 게 분한 듯 폭음을 일삼았고 그 분풀이를 방 선생에게 해대었다. 술만 취하면 지게작대기로 늘씬 두들겨 패기 일쑤여서 양아버지를 피해 이웃집에 숨어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 날이 여럿이였다. 점점 포악해지던 양아버지는 어느 날 마을의 한 청년과 논에 물대는 문제로 다투다 낫에 찔려 그만 죽고 말았다. 논마지기가 많은 부농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중농의 규모로 농사를 짓던 땅은 하루아침에 방선생의 차지가 된 것이다. 수 백 번이나 양아버지 집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몇 차례 도망질도 해보았지만 양아버지 손에 붙잡혀 되돌아 온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방 선생은 양아버지의 재산을 급매로 처분한 뒤 적지 않은 돈을 지니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는 본인의 한량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몇 년간 유람을 하며 부잣집 도련님 행세를 했다. 그동안 받았던 서러움과 배고픔에 복수라도 하는 양 거침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이미 상당부분의 돈이 없어지고 말았다. 할 일없이 시내 이곳저곳을 떠돌다 우연히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에 가보니 주식 매장이였다. 여기서 어떤 노인하나를 만났는데 젊어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소일거리로 주식투자를 해서 용돈 정도나 충당하고 있다는 노인이었다. 노인에게 식사대접을 하며 주식에 대해 이모저모를 묻다가 남아있는 돈을 다 썼다고 치고 증권주와 은행주에 몽땅 쓸어 넣었다.
그리고서는 중동에 파견되는 근로자로 지원하여 다행히 합격하였고 술도 없고 여자도 없고 살인적인 더위만 가득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래바람과 열기와 싸우며 4년을 지내다 돌아왔다. 꽤나 많은 급여가 모여졌고 귀국하여 알아보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져있었다. 주식에 투자했던 돈이 10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돈을 3등분하여 한 몫은 강남에 APT를 사서 세를 주었고(다 아시다시피 나중에 가격이 엄청 올랐다) 또 한 몫은 아는 부동산 업주의 권유로 서울 인근 곤지암에 집터를 낀 임야를 사두고(말 할 필요 없겠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 배가아파 욕이 나올 정도로 나중에 어마어마 무지막지할 정도로 가격이 올랐다) 나머지 3분의 1은 현금으로 예금해 두고 이 돈을 가지고 몇 년 동안 놀면서 세계여행을 다녔다.
태국의 파타야, 홍콩, 마카오 등과 영국과 프랑스 미국하와이까지 세계 구석구석 유명 여행지를 다녀왔고 칠레의 쿠에고 섬에서는 근 6개월을 머물며 남극에까지 다녀왔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4년 고생을 이런 식으로 실컷 풀고 보니 여행 다니는 것도 슬슬 싫증이 나서 하와이여행 때 만난 재미교포 여성을 다시 만나러 미국에 건너왔다. 이 교포여성은 결혼에 한 번 실패하고 하와이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선물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혼할 때 받은 위자료가 많아 생활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소일거리로 가게를 운영하는 여자였다.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하고 다소 거친 방 선생이 이 여자분 에게는 사내다운 매력으로 보였나보다.
하 기사 ‘제 눈에 안경’이라고 짚 세기도 짝이 있는 법! 방 선생은 이 여성분과 몇 년을 동거하다 결국 결혼하게 된다. 방 선생은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본가 부모형제하고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한다. 과거를 되돌아보기도 싫었고 XX 멍 째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 우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먹거리를 두고 으르렁 거리며 다투던 형제들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존재인데다 귀찮다고 버릴 땐 언제고, 방 선생이 양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눈을 까 뒤집고 아들로부터 이것을 뺏으려고 할 짓 못할 짓 해대던 부모에게도 만정이 다 떨어져 아주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이다.
하와이 가게를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이곳 LA로 이사한 방 선생을 필자가 처음 보았을 때 한말은 “선생께서는 부모형제 덕 없이 세계 곳곳을 떠도는 역마살을 타고 났고 학령기 운이 나쁘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셨겠지만 운의 흐름 곳곳에 횡재수가 많아 일생에 돈 걱정은 없이 사셨을 듯합니다. 평생 뚜렷한 직업은 제대로 갖고 있지 않았겠지만 문서 운이 좋으니 이런저런 투자로 큰돈을 버셨겠고 호탕하게 그 돈을 써 댔지만 재물은 계속 불어나는 형국이여서 지금도 꽤나 큰 재산을 지니고 계시겠습니다!” 라는 말이었다. 필자의 말에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하하하! 팔자는 못 속인 다 더니 저는 이제껏 제 팔자대로 살아온 셈이군요. 어떻게 저를 옆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 하십니까? 대단합니다!” 라고 하며 호탕하게 웃는데 어딘지 허풍 끼가 있어보였다. 이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동부인하여 필자를 자주 찾곤 했는데, 요 근래 몇 년 사이에는 어디 멀리로 이사를 갔는지 통 소식이 없다. 운이 좋아 호탕하게 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내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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