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나니를 재상으로 만들다.
심 희수(1548~1622)는 장안에서 소문난 개망나니 날건달 이었다. 개국공신인 심덕부의 후손이자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었으나 청백리였던 아버지가 어린 그를 두고 죽자 집안이 몰락하여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글공부는 꿈도 못 꾸고 날건달 생활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용모는 어느 사내 못지않게 잘생기고 성격도 호탕했으나 어려서 부터 너무 굶주리고 무식하다보니 먹고 자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개망나니 짓으로 행패를 부려 이를 채우는데 급급했다. 인근 동네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행패를 놓아 한상 얻어먹는 게 심희수의 큰 낙이였다. 이렇다보니 비록 명문가의 자손이기는 하나 동네 사람들은 그를 개망나니 날건달, 비렁뱅이 취급을 했다.
어느 날인가 권세가집의 잔칫집을 찾은 심희수는 사람들의 눈총에도 아랑곳 않고 잔칫상에 억지로 끼어 앉았다. 혀를 차며 그를 경멸하는 표정의 사람들 시선은 무시하고 눌러앉아 산해진미를 맛보며 평소의 습관대로 시중을 드는 기생들을 흘깃흘깃 살펴보며 음탕한 눈길을 보내는데 한 기생이 유난히 그의 눈에 들었다. 용감하고 무식한 심희수는 염치없이 자리를 옮겨 그 기생의 옆자리로 비집고 들었다. 다들 눈을 찌푸리고 시중을 들던 기생들도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데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이 기생은 싫은 기색 없이 엉덩이를 옆으로 비틀어 희수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그를 바라보는 눈길 또한 싫지 않은 기색인데다 살짝 눈웃음까지 지어주는 게 아닌가! 심희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잘만하면 공짜 오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길을 기생에게 보냈고 이 기생역시 눈길을 피하지 않고 요염한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눈길로 그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허벌레 해서 따라나선 심희수에게 그 기생은 그의 귀에다 대고 “도련님, 먼저 댁에 가서 저를 기다리세요!” 라고 했다. 완전히 열에 들뜬 심희수는 정신없이 집에 돌아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초조하게 그 기생을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심도 들었다. ‘귀찮은 나를 따돌리려고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 같은 놈에게 그리 적극적으로 나올 수가 있는가?’ 이런저런 생각에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해가 지기 직전 그 기생이 집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심희수는 ‘아싸!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구나!’ 싶어 버선발로 뛰어나가 기생을 맞았다. 이 기생의 이름은 일타홍 이었다. 비록 양반들의 노리개로 이 사내 저 사내 품에 안기는 천한 신분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신분제가 엄격한 사회제도상 팔자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기상이 크고 뛰어난 낭군을 만나 그를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겠다는 포부였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들떠 잔뜩 흥분하여 자신을 품으려는 희수를 제지한 일타홍은 “우선 어머님부터 뵈어야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일타홍은 심희수의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다음 자초지정을 고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관상공부를 해서 관상을 좀 보는데 아드님의 사내답고 호방한 기상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상입니다. 하지만 ‘진흙 속에 묻힌 진주’이니 서둘러서 그 진흙을 닦아내지 않는다면 어느 세월에 빛을 내겠습니까? 제가 비록 천한 기생이오나 마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오늘부터 기생노릇을 그만두고 오로지 아드님의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칠까 하옵니다. 제가 하찮은 욕심을 채우려고만 들었다면 구차한 과부댁 자재를 꼬이겠습니까? 부디 접어 생각 하소서!” 라고 간절히 청하였다. 심희수의 어머니는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끼니 잇기 가 어려운 지경인데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도 개망나니 짓으로 이제는 완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던 차이라 손해 볼 것도 없다는 심경으로 허락했다.
이날로 일타홍은 백수건달 심희수의 새색시가 되었다. 그녀는 그동안 기생질로 모은 재물로 심희수를 공부 시키고 가사를 꾸려가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학식 높은 노수신의 문하가 되어 글공부를 시작하게 하였다. 매일 일타홍을 품고 싶어 안달하는 심희수에게 “책을 한 권씩 떼면 그때마다 잠자리를 하겠습니다.” 라고 하며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심희수는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타홍의 채찍만큼이나 심희수의 머리와 노력도 예사롭지 않아 공부는 급속히 진척되었다.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스물두살에 진사시에 합격 하였고 3년 뒤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심씨 가문의 옛 영광을 찾았다.
온 동네 사람들은 새색시의 피나는 정성이 이제야 결실을 맺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가난한 집의 여느 아낙처럼 밭 메고 물 길고 남의 집 궂은일도 마다않고 해온 희생을 알기 때문이었다. 일타홍은 자신이 어차피 정실부인이 될 수 없기에 어머니에게 청을 넣어 심희수의 혼사를 서두르게 하였다. 일타홍은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인정하고 버젓한 양가집 규수를 심희수가 정실부인으로 맞아 가문을 바로 세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타홍은 자신의 공을 절대 내세우지 않고 새 며느리로 들어온 양반집 규수를 정실부인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래서 부부간이나 두 처첩 간에 말다툼 한 번 없이 가정이 평온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 심희수의 벼슬은 계속 올라 이조낭관이 되었다.
그제야 일타홍은 남편에게 한 가지 청을 넣었다. 친정이 있는 금산으로 부부가 같이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심희수는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임금에게 금산 고을살이를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다.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일타홍은 군수의 부인이 되어 금의환향한 것이다. 일타홍은 일가친척들을 불러 사흘 동안 잔치를 벌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미인박명’이라는 말처럼 몹쓸 병을 얻어 죽었다. 죽기 전에 그녀가 남긴 말은 “나으리 제가 죽거든 꼭 심씨 선산에 구석자리에라도 묻어주세요!” 였다. 죽어서도 심씨 집안의 귀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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