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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벼락출세

2022.10.21




             벼락출세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운명이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의 비서실장과 국방부장관, 서울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했던 만송 이기붕은 조선조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충북 괴산군에서 1896년 태어났다. 이기붕은 보성 중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직전에 중국을 거쳐 유학차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이력서에는 미국 데이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3‧1신문을 간행 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것은 완전한 허위위조 이력이다. 허위 이력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서울시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뒤 국회의장 까지 지냈다. 


여기에 더하여 부통령에 까지 당선된 뒤 일국의 대통령까지 노렸으나 과욕은 화를 불렀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직에서 사임한 뒤 이승만 대통령 하야로 사면초가에 몰려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고 있다가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킨 큰아들 강석이 60년 4월28일 새벽 5시 40분에 권총으로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강욱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아들의 손에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로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기붕은 미국생활 15년 동안 데이버 대학에 1년 적을 둔 기간을 빼고는 14년 동안 미국 부잣집에서 하우스보이로 일을 했다. 미국가정에서 노동을 하며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을 고스란히 이승만에게 바쳤다.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뉴욕에서는 이기붕, 이곳 LA에서는 임영신이 이승만에게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였다는 것은 당시 미국교포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라 한다. 당시 나중에 아내가 된 박마리아는 남쪽 테네시주 내쉬빌 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는 늘 뉴욕에 오곤 했다 한다. 박마리아는 교포남자 유학생들과 교제하기를 늘 갈망했는데 못생긴 외모에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성격이 강해 어떤 남학생도 박마리아에게 데이트를 청하는 이가 없어 박마리아가 무척 속상해했는데 몸이 약해 늘 비실비실하여 여학생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아본 적 없는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서로 사귀게 되었고 약혼까지 하게 된다. 


헌데 박마리아가 약혼반지를 이기붕에게 되돌려주고 대학졸업 뒤 귀국해버리자 이기붕은 퍽이나 크게 상심을 하였다 한다. 그 후 이기붕이 뒤따라 귀국한 뒤 1년 뒤 박마리아와 다시 만나 결혼을 한다. 이기붕은 귀국한 뒤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구멍가게도 운영했고 광산직원, 다방과 요리집 등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더군다나 박마리아도 결혼직후 이화여대 교수직을 그만 두게 되어 생활고는 더더욱 심해졌다. 북아현동에서 구멍가게를 할 때 매일 이기붕은 남대문시장에서 물건을 사오고 박마리아는 열심히 물건을 팔았지만 하루 종일하는 중노동에도 가게유지가 어려웠다. 


결국 폐업하고 종로 네거리의 작은 장소에서 다방을 연다. 이기붕은 차를 열심히 나르고 부인 박마리아는 차를 만들고 금전출납 일을 하였다. 하지만 다방도 장사가 안 되어서 폐업하고 친구 최남이 운영하는 광산에 취직을 한다. 최남은 이기붕의 친구로 재산가였다. 구멍가게와 다방도 최남이 자금을 꿔주어서 가능했던 거였다. 광산에서 몇 년 고생했지만 생계유지가 어려워 결국 이기붕은 국일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국일관도 최남의 소유였다. 국일관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던 이기붕은 해방과 더불어 벼락출세를 하게 된다. 주군인 이승만이 금의환양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는 조국을 떠난 지 34년 만에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영웅으로 입성하였다.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근 3년간 돈암장에 살다 시피하며 가복노릇에 열과 성을 다했다. 주군인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이승만 박사가 48년 7월2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이기붕은 벼락출세를 한다. 이승만 집권 12년간 이기붕은 대한민국의 제2인자로 군림한다. 착하고 성실했던 이기붕은 고관대작의 영예를 누리면서 부정부패와 오만불손에 빠지게 된다. 결국은 과욕이 화를 부른다. 병약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부통령 후보로 나가 85세의 고령인 대통령에게 4년 권좌를 더 누리게 하려고 부정선거를 획책하였고 결국 4‧19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어느 한사람에게 올인 하여 이기붕처럼 벼락출세한 정치인으로는 새 정치 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1942년 6월5일생인 박지원은 전남진도군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종식은 일제말기 진도에서 목화수매 책임자로 친일파 두목 행세를 했었고 해방 뒤 남로당 진도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숙부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반란군에 가담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생활을 하다 군경의 추적을 피해 진도에 숨어 들었다가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순경에게 총격전 끝에 사살 당했다. 아버지를 잃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박지원은 미국뉴욕에서 가발장사로 큰돈을 벌어 성공한다. 가발장사로 성공을 하자 박지원은 야망을 품게 된다. 


80년대 당시 미국각지의 호남출신 교포들은 광주학살에 분노하여 호남향우회를 결성하고 전두환을 규탄 분위기가 극에 달했는데 당시 30대의 성공한 가발장사 박지원은 뉴욕 한인회장에 당선된 뒤 주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방문하는 전두환을 환영하기 위해 ‘전두환 뉴욕방문 환영위원장’을 맡게 된다. 전두환은 뉴욕방문을 박지원 덕분에 무사히 마치고 교포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명분으로 박지원에게 국가유공 훈장을 주었다. 이 때문에 교포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던 박지원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당시 뉴욕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던 김경재씨의 도움으로 정권탄압을 피해 외유 중 이던 DJ를 소개받고 충성을 맹세하며 열렬한 후원자로 표변한다. 


조선 최고의 지략가 였던 한명회를 능가하는 모사와 지략으로 DJ의 신임을 받게 되고 벼락출세를 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뉴욕에 있을 때부터 모사와 지략에 능해 이런저런 구설수(유명여배우와의 동거‧유부녀와의 스캔들 등)가 늘 따라 다녔지만 특유의 지략으로 매번 이를 헤쳐 나가며 DJ정권의 2인자로 승승장구 하였고 지금 현재까지도 새 정치 민주연합 DJ세력의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어찌되었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미국 교포사회가 낳은 걸물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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