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봉남씨!
김봉남 씨는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특유의 적극성과 낙천성으로 이를 극복해 왔다. 표정도 늘 밝고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전남 진도의 딸 부자집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내리 딸만 낳자 사내 아우 보라고 이름을 봉남 이라 지었다. 하지만 봉남씨 아래 태어난 아기마저 딸로 태어나 이름값을 못하고 말았다. 봉남씨는 이름 덕분인지 몰라도 어려서 부터 성격이 꼭 남자아이 같았다. 부모님은 ‘아들로 태어날 놈이 고추를 달지 못하고 태어났다!’ 하며 매우 아쉬워했다.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그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아들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여 계속 자식을 낳았지만 봉남씨의 아우마저 딸로 태어나자 결국은 단념하고 말았는데 “어떻게 된 게 내 불알 속에는 계집애들 씨만 들어 있 당가? 아마도 팔자에 필시 아들이 없을 것이여! 군내면 돌팔이 점쟁이 놈 말만 믿고 계집천지를 만들었당께!” 라고 하며 한탄했다 한다. 가난한 농사꾼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난 봉남씨의 인생은 어려서 부터 순탄치 못했다. 어려서 심하게 홍역을 앓다가 거의 죽은 것을 아버지가 아주 죽은 것으로 알고 내다 묻으려고 봉당에 내놓은 것을 그래도 안타까워 어머니가 이불을 덮어 놓았는데 아버지가 지게에 실으려는 순가 꿈틀대며 깨어나 목숨을 건졌다. 한번은 동리 친구들과 바닷가에 나가 놀다 파도에 휩쓸려 멀리까지 떠내려갔는데 마침 지나던 고깃배가 발견하여 건저주어 겨우 죽음을 면했다. 원체 사내애들 마냥 겁이 없어 바닷가 위태한 곳에서 놀다 당한 사고였다. 학교는 초등학교 2년 다니다 말았다. ‘기집이 배우면 팔자가 쎄진당께!’라는 아버지의 황당한 주장 때문 이였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지으며 살다 머리 커지고 나서 대처에 나온 게 15살 때 였다. 처음 광주의 친척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서울로 식모살이를 나왔다. 어린나이에 고된 살림을 죄 맡아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정작 힘든 것은 주인집의 남자들 때문 이였다. 60이 넘은 주인집 할아버지가 마나님 모르게 직접거리고 동갑내기 손자 놈도 틈만 나면 직접 거리는데 미칠 노릇이 였다. 당시는 이런 일이 흔해서 어린나이에 식모살이 하려면 각오해야하는 시련이 였다. 필자도 이와 비슷한 일을 목격한바 있는데 필자의 먼 일가되는 분 집이 큰 공장을 운영했는데 이 집에 들어온 어린 식모들을 그 집 아저씨가 죄다 건드려서 그 집은 식모를 뽑는 기준이 덩치가 크고 못생겨서 남자들이 욕심내지 않을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여야 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쎄야 아저씨를 물리칠 수 있고 추한 용모여야 아저씨가 집적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 이였다.
어렵게 어렵게 식모살이를 하며 겨우 돈을 모은 봉남씨는 인천에 작은 다방을 열게 되었다. 말이 다방이지 테이블 대 여섯개에 불과한 규모였다. 하지만 수입은 꽤나 짭짭했다. 돈을 모아 더 큰 다방을 계획하던 중 얼굴이 허여물건 일도씨를 만나게 된다. 동네 건달인 일도씨는 동네 양아치들이 가게에 와서 행패를 부릴 때마다 나서서 이를 막아주었고 둘은 깊은 관계가 된다. 일도씨와 살림을 차렸다. 아들도 하나 태어났다. 일도씨는 한량이어서 절대 일을 해서 돈 버는 일이 없었다. 오직 마누라 수입에만 의존하며 용돈타서 희희낙락하고 살았다. 이런 일도씨가 바람이나서 집을 나갔고 집나가면서 집에있던 세간이며 귀중품과 돈을 싹 털어갔다. 집 전세금과 가게 보증금마져 뻬서 달아나자 봉남씨는 아들 하나만 덜렁 남고 알거지가 되었다.
딸린 혹이 있으니 남의 집 식모살이 자리도 잡기 어려웠다.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겨우 버텨나가다 봉남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주변사람들 소개로 돈 많은 홀아비 영감님 후처자리로 들어갔다. 몇 년 뒤 영감님이 돌아가시자 봉남씨에게도 다시 봄날이 왔다. 적지않은 유산을 물려받게 된 봉남씨는 이 돈은 밑천삼아 부동산투기에 나선다. 당시 강남개발이 막 시작하던 시기였고 APT투기가 판을 치던 세월이라 봉남씨는 일약 큰손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애 아비인 일도씨가 찾아 와 뻔뻔스럽게 재결합을 요구했으나 봉남씨가 고용한 진짜 깡패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아킬레스건까지 짤려 다리병신이 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들놈은 자라면서 지애비를 빼닮았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외제차 타고 다니며 기집애들 후리기에 바빴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술처먹고 과속으로 야외를 질주하다 사고로 죽고 말았다. 피눈물을 쏫던 봉남씨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한국생활을 정리한 뒤 사촌언니가 사는 이곳 LA로 건너온다.
한국에서는 아들놈 생각 때문에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워서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한 결같이 지지리도 궁상을 떨고 사는 언니들과 동생에게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씩 큰 밑천을 때어주었고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도 으리으리하게 조성하여 모신 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한국을 영원히 떠났다. 이게 25년 전 일이다. 미국에 와서도 봉남씨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게 된다. 미국에 와서 첫 번째 겪은 시련은 사촌언니에게 큰 사기를 당한 것 이였다. 미세스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사촌언니는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사기꾼이였다. 고씨성 지닌 남편과 콤비를 이뤄 ‘환상의 부부사기단’으로 맹활약을 했다. 일가친척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모두에게 사기질을 쳐댔다. 나중에는 이 수법이 너무 해 처먹어 잘 먹히질 않자 영주권 사기질에 까지 나섰다. 이 사기꾼 사촌언니로 인해 어머어마하게 큰 돈을 사기당하고나자 낙천적인 봉남씨도 당황하고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큰돈을 날리고 이억만리에서 또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암담한 지경이였다. 하지만 불굴의 봉남씨 낙담만하고 있지않았다. 예전에 도와주었던 자매들에게 부탁하여 소액의 자금을 조성한 뒤 음식점 사업에 뛰어들었다. 어떤 자매는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래도 호응해 주는 자매들이있어 작지만 정결한 식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즈음 필자와 인연이 되어 이후 매해 빠짐없이 찾아 오시는 단골 고객이 되셨다. 손발이 부르트는 고생을 겪었지만 다시 식당으로 재기하게 되었다. 음식이 정갈하고 봉남씨의 화통함과 손이 큰 넉넉한 인심으로 고객이 끊이질 않아 2호점, 3호점 하는 식으로 사업이 켜저갔다. 언젠가 필자를 찾아와 “선생님! 인생 살아보니 그거 정말 별거아니였습니다. 왜 그리들 아등바등 사는지 모르겠어요! 지나고보면 별것도 아닌것 을 가지고 울고불고하고 노심초사들하고 사니!” 초연한 모습으로 희쭉 웃는 봉남씨를 보니 거기 한 도인(道人)이 앉아 계신 듯 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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