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늙은 난봉꾼의 후회

2022.12.05

 




         늙은 난봉꾼의 후회  


 송 선생님은 70평생 직업 없이 살아온 한량이다. 서울의 부자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와 형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다소 버릇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악동이여서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못된 짓은 골고루 하며 청소년기를 맞는다. 술, 담배는 물론 뽄드 까지 불어가며 (공업용 접착제를 비닐봉지에 짜 놓아 넣고 이를 흡입하면 환각상태에 이른다 하다.) 이런저런 사고를 쳐댔지만 집안이 부유한 관계로 경찰서 신세는 졌지만 다행이 소년원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게 다 부모의 금전적 노력으로 피해자들과 합의했기 때문이다.


합의금으로 나간 돈 이 웬만한 집한 채 값이 족이 될 것 이라했다. 다행이도 머리는 나쁘지 않아 이런 망나니짓을 하면서도 학교 성적은 그럭저럭 유지하여 건국대 축산과에 진학하여 목장 주를 꿈꾼다. 그런데 대학재학중 인근 여고 여학생을 건드려 덜컥 임신을 시키고 말았다. 이런저런 난리굿을 친 끝에 아이(아들)가 태어났고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한다. 어린 아빠가 되었고 한집안의 어린가장이 된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부부가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남편은 대학생이고 부인은 고등학생이라는 묘한 부부였다. 


아이는 어머니가 데려다 키워 주셨기에 학교생활의 어려움은 없었다. 어린 부인은 여고 졸업 후 간호대에 진학하여 간호사가 되었고 송선생은 방위로 군복무를 마친 뒤 사업 한답시고 전국을 떠돌며 유람을 즐긴다. 친구와 함께 전복 양식업을 한답시고 이곳저곳 전국 해안도시와 바닷가를 유람하며 주색에 빠져 지냈다. 사업은 명목상 핑계였을 뿐이다. 이렇게 지내다 미국에 살고 있던 큰누이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오게 된다. 부인은 미국에 와서도 간호사 생활을 했다. ‘집에서 새던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는 말이 있듯이 미국에 이민 와서도 한량 기질은 변함없었다. 이런저런 사업 한답시고 본가에서 목돈을 가져다 사업은 뒷전이고 매일같이 여자 후리기와 술타령이 계속 되었다. 본가의 재산이 기운 뒤 마지막으로 받아 낸 집한 채 값도 2-3년을 놀면서 탕진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부인의 간호사 경력이 높아져 수입이 좋아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부인은 이런 송 선생님을 아예 한수 접고 내버려 두었다. 평생 그 꼴을 보고 살아왔으니 아마도 체념했을지 모른다. 


툭하면 이런저런 잡년들과 살림 차리고 몇 달씩 지 맘대로 집에도 들어오지 않다가 몇 달만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평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선 그래도 가장이라고 큰소리만 처대는 남편이 꼴같지 않아 아예 상대하려 들지도 않았다. 이러다 보니 송선생은 계속 기고만장 해져만 갔다. 본가에다 손 벌릴 형편이 못되니 이제는 부인에게 돈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야근까지 마다하지 않고 죽어라 일해서 조금 목돈이 모이면 그 돈을 무슨 수작을 벌려서라도 뺏어갔다. 폭력을 행사하며 강압하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구슬리기도 하면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돈을 빼갔다. 돈이 생기면 주위에 건달친구들을 우르르 거느리고 유흥업소부터 찾았다. 


항상 건달친구들이 주렁주렁 박 매달리듯이 따라다녔다. 화통한 성격에 술값을 아끼지 않고 호탕하게 써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송선생이 위태로우면 목숨까지 내줄 것 같은 알랑방구를 끼어대며 주위를 멤도는 친구들이 늘 북적였다. 돈이 충분하면 룸싸롱에가서 어린 여자들 데리고 놀다가 2차를 나갔고 충분치 못하면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 가서 여자들과 부킹해서 놀다가 눈 맞으면 그날로 함께 자빠졌다. “이혼녀든 유부녀든 나와 1시간만 앉아있으면 바로 자빠트릴 수 있다.”고 평소에 장담해 오던 송 선생이다.


예전에 송선생 부인께서 필자와 상담을 하셨을 때 필자 왈 “그래도 여사님이 대단 하십니다! 그런 남편과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참고 보내셨습니까?”라고 한즉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도 애들 아빠인데!”라고 답을 해 올 정도로 착한 여인 이였다. 그런데 이토록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디착한 부인이 덜컥 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암중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췌장암에 걸린 것이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3개월 정도 밖에 못 산다했다 한다. 초췌한 얼굴로 상담을 하러 온 부인은 선하디선하게 생긴 사슴같이 큰 눈에 물기를 머금고 묻는다. “선생님 제가 틀림없이 죽을 운명인가요? 정말 억울합니다! 누구보다도 남들에게 나쁜 짓 안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하필 왜 저에게 이런 나쁜 일이 생긴 걸까요? 제가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나요?”라고 애타게 물으신다. 


아무 말도 하기가 어려웠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 어렵게 필자 왈 “기적 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여러 언론 매체에서도 꼭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기적적으로 회복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좌절하지 마시고 이러저런 노력을 하시다보면 여사님에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올 수도 있지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겨 놓으십시오. 이렇게 마음먹으면 다소 마음이 편해 지실수도 있어요!”라는 애매한 말로 답을 하며 위로해 드렸다. 그 후 부인은 야속하게도 얼마 못가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그 뒤 시간이 꽤나 흐른 뒤 오래전에 한번 부인과 함께 필자를 찾은 뒤 수년간 얼굴을 보지 못했던 송선생이 필자를 찾았다.


오랜만이여서 필자는 송 선생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부인 이야기를 하며 필자의 기억을 되살려 놓은 송 선생은 긴 한숨을 내쉰 뒤 “내가 천벌을 받아 죽을 놈인데 하늘은 왜 나 같은 잡놈은 뇌두고 천사같이 착한 내 와이프를 데려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해도 너무 했지요! 인생 정말 헛 살았습니다. 잡놈 옆에는 잡놈들만 꼬인다고 내가 술 사주고 할 때는 그렇게도 쫒아 다니던 친구라는 놈들이 내가 돈 떨어지고 나니깐 코빼기도 비추질 않아요! 와이프 장례식 때도 어쩌면 한 놈도 오지 않았어요!” 라고 하더니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어차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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