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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성웅 이순신의 고뇌

2023.01.11

 



                 성웅 이순신의 고뇌 


 역사 속에는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역사에 있는 이런 영웅의 경지를 뛰어넘어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이가 두 명 있었으니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과 성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이순신(1545~1598)은 50대중반에 생을 마쳤지만 그 생애 전반은 고통과 번민의 연속 이였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에 겨우 급제하여 관계에 나오게 된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 비하면 출발이 매우 늦은 편이였다. 무과 28명의 합격자 중에 하위권인 병과에 합격했으니 무예가 탁월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순신의 관료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초년에는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성웅 이순신도 운명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이런 그에게 큰 기회가 올 뻔 했으니 1589년(선조22년) 이산해와 정언신이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했다. 선조도 이순신을 채용하려 했으나 결국 논의에 그치고 만다. 큰 기대를 가졌지만 결국 ‘좋다가 만’ 셈이다. 수령가운데 제일 말단에 속하는 정읍현감(종6품)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에게 인생의 대 전환점이 왔으니 이것은 바로 조정의 실력자 유성룡의 추천을 받게 된 것이다. 


1591년(선조24년) 드디어 이순신은 파격적인 출세를 비로소 하게 된다. 그해 2月13日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는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종6품인 정읍현감에서 무려 일곱 계단을 뛰어 오른 파격적 인사였다. 전라 좌수사는 정 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법! 사간원에서 관작을 지나치게 남용한 처사라며 끈질기게 반대했지만 선조도 고집을 꺽지 않고 발령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참으로 야릇한 게 운명이라고 원래 이 자리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앙숙이던 원균에게 돌아갈 예정 이였다. 원균은 체구가 엄청나게 큰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원균은 북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함경도 부령부사(종3품)로 승진했다가 정3품 당상관인 전라 좌수사로 제수되었다. 승진한 것이다. 그런데 죽어도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사간원이 반대하여 이를 가로 막았다. 원균이 수령으로 있을 때 인사고과 성적이 최악 이였기 때문이다.


선조도 뜻을 거둬들였다. 성질나서 씩씩거리고 있던 판에 자기하고는 비교도 안 될 하급관리인 이순신이 그 자리에 임명되자 원균은 기가 막혔다. 질투심이 타올랐고 자존심도 엄청 상했다. 원균은 이듬해 비로소 임진왜란 직전 경상 우수사로 임명 되었다. 전라 좌수사인 이순신과 경상 우수사인 원균의 악연은 이렇게 싹트게 된다. 원균이 이순신을 미워한 만큼이나 이순신도 원균을 미워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에 대한 기록이 유독 많다. 


이순신도 원균이 ‘헛소리를 잘한다.’고 했고 ‘해괴하다.’ ‘음흉하다.’ ‘고약하다.’ ‘허무맹랑하다.’ ‘흉악하다.’라고 표현했다. 난중일기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날정도로 인간적으로 증오하는 원균과 힘을 합쳐 공동의적인 왜적을 물리쳐야하는 현실 앞에 이순신의 번민은 커져만 갔다. 사사건건 괴롭히는 원균 외에 괴로움은 산적해 있었다.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군사들은 맥없이 죽어가고 있었고 살아남은 군사들도 계속되는 전투에 긴장과 피곤이 겹쳐 기력이 소진되어 산송장들 같았다. 명나라 군사들이 구원하러온다 했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심각한 군량부족 이였다. 전국이 전란에 휩쓸렸지만 이순신 덕분에 전라도지역만은 유일하게 온전했다. 그러다보니 군량은 거의 전적으로 전라도 곳간에서 퍼가는 셈 이였다. 허나 2년 넘게 전쟁이 이어지면서 전라도 곳간도 거덜이 날 지경인데다가 출정한 명나라 군사에게도 식량을 바쳐야하는 실정 이였다. 조선 군사들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초췌해져 갔지만 상국인 명나라 출정군들은 배불리 먹어 신수가 훤~ 했다. 잘 처먹어 기운이 뻗친 명나라 군사들은 이곳저곳에서 분탕질을 처댔다. 여자만보면 껄덕 대며 달려들어 욕 보였다. 이를 보고도 어쩌지 못했다. 상국 군사였기 때문이다.


더 더욱 기막힌 일은 당항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일어났다. 명나라 도사 담종인의 명령서(금토패문)에는 ‘적을 치지 말고 선단을 해체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적고 있었다. 왜놈장수에게 어마 어마한 뇌물을 받아 처먹고 내린 명령 이였다. 조선해군의 해산권은 국왕의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작전권은 이미 명나라 군부에 넘어가 있었다. 이때(1593년 11월) 담종인은 강화사의 자격으로 웅천에 있는 가토기요마사의 진에 와서 대접받고 있었다. 


기가막힌 상황 이였다. 사적으로 아들도 병이 깊어 오늘내일하는 상황 이였고 늙으신 노모도 팔순에 이르러 오늘내일도 장담 못하는 괴로움이 겹쳐있었다. 이런저런 괴로움에 시달릴 때 이순신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쾌를 짚어 보길 자주했다. 이순신이 불안한 내면을 다스리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점쾌는 괘효사주점(卦爻四柱占)이였다. 쾌효사주점은 사주팔자(생년월일시)의 간지(干支)를 계산해 얻은 수를 역경(易經)의 64쾌와 6효를 384가지로 조합해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여러 가지 괴로움이 극에 달해있을 때 이순신에게 은인이자 든든한 뒷배경 인 유성룡이 죽었다는 낭설까지 전해지자 불안한 마음에 운명에 대해 쾌를 짚어본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다. 유성룡의 운명을 짚어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라는 점쾌와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길쾌(吉卦)를 잡자 아주 기뻐하고 안도하는 모습도 기술되어 있다. 영웅이기 전에 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안쓰럽기도 한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 직전 명나라 장수 진진이 이순신의 출정을 막기 위해 이순신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오! 어찌 장군은 예방법을 쓰지 않고 있소?”라고 하였다. 허나 이순신장군은 이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더라도 결국은 못난 왕(선조)이 자신을 죽일 것임을! 장수답게 영광되이 죽기위해 장군선은 뒤에 머물며 지휘해야 한다는 전투원칙을 깨고 맨 앞에 서서 투구와 갑옷까지 벗어 젖친채 전투를 지휘하다 결국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절명하고 만다. 


죽어가면서까지 “나의 죽음을 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며 영웅다운 죽음을 맞는다. 성웅이 탄생하는 순간 이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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