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Parma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지휘자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있다.
토스카니니가 태어난 곳은 밀라노와 볼로냐 사이에 있는 '파르마'라는 도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웅대한 연주를 기억하는 나는 이 도시를 반드시 방문해야 했다. 파르마는 이탈리아에서는 생햄(프로슈토)과 파르메산 치즈(파르미자노)로 유명하다. 파르미자노는 피자 등 이탈리아 음식에는 꼭 들어 가야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치즈의 왕이다. 기차역에서 조금 걸어가니 주세페 베르디의 기념비가 보였다. 바로 옆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거주지였던 필로타 궁전(Palazzo della Pilotta)이 있다. 궁전은 9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지만 일반에 공개된 곳은 국립미술관과 파르네세 극장 두 군데 뿐이다. 16세기 중엽 전성기를 누린 파르네제 가문은 교황, 추기경, 왕비, 수많은 군주들을 배출한 이탈리아의 명문가다. 국립미술관에는 14-16세기 토스카나파와 에밀리아파의 초기 작품들이 전시돼 있으며 에트루리아의 대규모 공동묘지인 벨레이아와 선사 시대 유적지에서 발굴한 전시물들이 전시돼 있다. 파르네세(Farnese) 극장은 내부 전체가 나무로만 만들어진 매우 특별한 극장이다. 건축가 조반니 바티스타 알레오티가 1618년부터 짓기 시작해 10년만에 완공했다. 3,000명이 앉을 수 있는 극장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오르아르도라는 신랑과 마르게리타라는 신부였는데 오르아르도는 파르네세 가문의 아들이고 마르게리타는 메디치 가문의 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재벌가의 결합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콘서트 또는 오페라를 공연한다. 자주 공연되는 것은 레퀴엠, 팔스타프 등 주로 베르디의 작품들이다. *베르디는 토스카니니가 존경한 3명의 작곡가(베토벤, 바그너, 베르디) 중 한 명으로 론콜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2001년부터 시작된 베르디 페스티벌(Verdi Festival)은 파르마의 가을을 베르디의 오페라로 물들인다. 아이다, 나부코,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 오페라는 주로 레지오 극장에서 공연된다. 1829년 개장한 레지오 극장(Teatro Regio)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내부는 눈부시도록 황홀하다. 파르마는 피렌체나 피사처럼 두오모, 종탑, 세례당이 함께 세워져 있다. 11세기에 지어진 두오모는 외부는 로마네스크 양식, 내부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로마네스크는 10-12세기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이다. 이곳에는 코레조(Correggio)가 1524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둥근 천장 프레스코화가 있다. 성모 승천을 그린 이 작품은 구름에 휩싸인 수많은 천사들이 나선형으로 돌며 수직 상승하는 모습이다. 혹자는 코레조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중세의 성당에서 환하게 빛을 뿜는 코레조의 프레스코화는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성모 승천 외에도 본당에는 지롤라모 베돌리 마졸라(Girolamo Bedoli-Mazzola)의 최후의 심판 등 파르마 출신 화가들의 작품들이 그려져 있다. 핑크빛의 팔각형 세례당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건축물이다. 내부는 16개의 아치로 구성돼 있으며 성 세례 요한과 아브라함의 삶이 4계절 등으로 묘사돼 있다. 세례당이 중요한 것은 중세에는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두오모 출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탑에도 오르고 싶었으나 내부 수리중이어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산 조반니 수도원 교회"는 바로크 양식의 파사드가 있는 우아한 건축물이다. 이 교회의 기원은 10세기로 올라 가는데 교회는 16세기, 오른쪽 종탑은 17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원형 천장에는 코레조가 1520-1524년 사이에 그린 성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먼저 프레스코화를 그린 후 대성당과 계약한 후에 대성당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본명이 안토니오 알레그리인 코레조는 파르마와 모데나 사이에 있는 그의 출생지명을 따서 부른 이름이다. 드디어 토스카니니가 태어난 생가에 도착했다. *토스카니니는 1867년 3월 25일 서쪽에 있는 작은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옷을 마름질하는 재단사였다. 토스카니니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단사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파르마 음악원에서 첼로, 화성, 작곡을 공부하며 그의 꿈은 음악가로 바뀌게 된다. 13살 부터는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가 되어 오페라 연주를 하는 경험을 쌓는다. *이후에도 그는 작곡자로 또 지휘자로 사람들 앞에서 연주와 지휘를 하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토스카니니는 9년동안의 음악원 생활에서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공부하고 연습했다. 우수하게 음악원을 졸업한 토스카니니는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로주자가 되어 브라질을 방문하게 됐다. 그리고 1886년 6월 25일 리우데자이네루의 공연에서 토스카니니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터지고 만다. 현지의 지휘자 ‘레오폴드 미게스’가 지휘를 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연주해야 할 작품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지휘는 관중들의 놀라움 속에서 대성공으로 끝났다. 불과 19살의 나이로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것이다. *총 2시간 30분에 이르는 아이다를 악보없이 지휘하는 토스카니니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을 것이다. 토스카니니가 태어난 방으로 들어 가니 초상화와 그가 사용하던 손거울, 펜, 메모지, 안경 등이 보인다. *1936년,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로 뉴욕 필의 지휘봉을 내려 놓았다. 그러자 토스카니니를 위해 뉴욕국제방송협회에서 창단한 오케스트라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였다.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 토스카니니가 태어난 방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글, 사진: 곽노은
*표시의 이미지(8장)와 토스카니니의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