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몽 평신도 목회자 Jay 목사님 이야기"

2024.05.19

                                                             조정래 목사의 세상 사는 이야기


                                                            "몽 평신도 목회자 Jay 목사님 이야기"


요즘 우리 교단에서 하는 교회 성장을 위한 목회자 연장교육 수업을 받고 있는데, 지난주는 대절버스를 6시간 타고 미조리주 St. Louis에 있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 (The Gathering UMC)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내 옆자리에 앉은 몽족 출신 평신도 목회자 Jay 목사님이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70살인 할아버지인데도 목회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대단한 그분은 겸손하면서도 자부심이 있는 분으로 여겨 졌다.


그분은 미국 병원에서 전문간호사 (Nurse Practitioner)로 30년 일한 후 은퇴하고 지금은 몽족 연합감리교회의 평신도 담임목사롤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교회에서 봉급을 한푼이라도 더 주기를 바라는 삯꾼 목사인데 비해, Jay 목사님은 그 동안 전문간호사를 하며 벌어 놓은 돈과 넉넉한 은퇴연금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서 봉급을 한푼도 안 줘도 된다고 했더니, 감리사가 교회에서 약간이라도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약간의 봉급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돈 욕심을 초월한 Jay목사님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Jay 목사님은 월남전 당시, 14살의 나이로 소년병으로 미군을 도와 4년간 공산군들과 싸우는 용병으로 일했다고 했다. 어떤 때는 의무병을 일하고, 어떤 때는 전투요원으로 적군진지에 올라가 싸우면서 다리에 총알을 맞기도 했지만, 전쟁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미군은 철수를 했다고 한다.


공산군이 이기는 바람에 미군을 도와 싸우던 라오스의 산족인 몽족에게는 큰 위기가 닥쳤다고 했다. 지도층의 사람들은 미군의 헬기를 타고, 탈출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몽족 사람들은 열악한 형편의 라오스에 머물거나, 작은 배를 타고 탈출을 하거나, 헤엄을 쳐서 메콩강을 건너, 태국에 있는 난민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미국이나 프랑스로 살 길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Jay도, 라오스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혼란을 틈타 탈옥한 후, 메콩강을 헤엄쳐서 태국에 도착한 후, 난민수용소에서 일년반을 살다가 전쟁난민으로 미국에 입국했다고 한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후, 공장에서 5년을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다가, 몽족 어린이들이 미국학교에 적응하도록 돕는 자원봉사 일을 하다가, 미국인 학교 선생에게, “태국의 난민수용소에 있는 조카들이 미국에 망명올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친절한 그 미국인 여교사는 정신과 의사인 자기 남편을 만나보라고 했다 한다.


Jay는 미국인 정신과 의사 부부를 자신의 작은 아파트로 초청하여 저녁식사를 대접하며, 미국에서 앞으로 뭘하며 살지 조언을 부탁했다고 한다. Jay는 정신과 의사에게, “의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졌더니, 그 정신과 의사는, “의사가 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어려운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대학에 등록하여 간호학을 공부하여 남자 간호사가 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Jay는 난민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대학에서 간호학을 무료로 공부했고, 간호사로 주말에 병원에서 일하면서, 주중에 간호학 석사과정을 공부하여, 전문간호사 자격증을 얻은 후, 30년간 병원에서 일하고 3년전에 은퇴한 후 지금은 몽족 교회에서 평신도 목회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한때 일년에 20만불이상 버는 전문 간호사일을 했는데, 왜 67세에 그 좋은 직장을 자원 은퇴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돈만 버는 일만 하다가 죽으면 뭐 하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 아픈 환자들을 도와 주는 일도 하나님 일 아니냐?”고 했더니, “사람의 몸만 고치면 뭐 하느냐?”고 했다.


Jay 목사님은 장성한 다섯 자녀들이 IT 전문가, 교사, 변호사, 엔지니어, 음악가등으로 잘 키웠고 손주들도 열명이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고 했다.


내가 Jay 목사님에게, “미국에 맨몸으로 도착하여, 전문 간호사로 성공하고, 자녀들도 잘 되고,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자원 봉사로 목회를 하고 있으니, 참 축복 받은 인생을 사십니다.”고 했더니, “정든 고국을 떠나고, 부모님도 라오스에서 가난하게 살다 의료혜택도 못 받고 돌아 가셨고, 형제들도 뿔뿔히 흩어져 사니,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모두 다 갖추고 살기는 힘든 것”이라 했다.


나는 몽족 사람들이 생활력이 강하여 미국에 잘 적응하여 훌륭하다고 했더니, 사실은 꼭 그렇지만 않다고 했다. 조국에서 쫓겨나와 낯선 외국에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 미국에 살면서 스트레스로 자는 중에 심장마비로 죽은 몽 사람도 많다고 했다. 교육을 받지 못해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람도 많다고 했다.


몇년전에는 몽족 출신 남자가 사슴 사냥 시즌에 백인들의 개인 사냥 지역에 들어 갔다가 백인 남자들로 부터 인종차별적인 욕을 듣고 위협을 받고, 사냥총으로 백인들을 여섯명 죽인 사건이 있었다. 몽 남성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자기방어 차원에서 총을 쏜 것이라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이 받아 들이지 않아,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지금도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이 일 있은 후, 다른 몽 남자가 사슴사냥을 갔다가 어느 백인 남자로 부터 총을 맞고 죽은 사건이 있었다. 몽 남자가 백인들을 죽인 일에 대한 보복행위라는 말이 있었다. 다행히, 몽 남자를 죽인 백인 남성이 체포되어 68년형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가끔 골프장에서 몽 남자들과 어울려 골프를 친 적이 있는데, 몽 남자들은 체격은 크지 않지만, 골프를 나보다 훨씬 잘 하는 것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다. 몽족 사람들은 같은 동양인이라 좀 가까운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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