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내마음의隨筆] 정렬공 최윤덕 장상의 지도력에 대한 교훈 (1 of 2)

2020.11.15

[내마음의隨筆]


정렬공 최윤덕 장상의 지도력에 대한 교훈


貞烈公 崔潤 (1376-1445) 將相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2] 나오는 권오호 선생의 기술에 따르면 최윤덕 장상의 생애 [1, 3, 4]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白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최운해(崔雲海)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윤덕(崔潤德))]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쏘았으며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태종 2) 낭장이 되고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 되었다가 1410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었다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올랐다. 1413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다.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세종 1)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파저강(婆猪江) 야인인 이만주(李滿住) 함길도 여연(閭延) 침입했을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했고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이듬해 적이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 나가 이를 진압했다.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있도록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1445년에 궤장(几杖) 하사받았다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해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호랑이를 잡은 뒤에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일도 있다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통천의 상렬사(尙烈祠) 안주의 청천사(淸川祠) 제향되었다시호는 정렬(貞烈)이다.
 [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윤덕(崔潤德))] 


필자는 최윤덕의 파란만장한 생애 탐구를 통해서 파악한 그의 뛰어난 지도력을 뒷받침하는 20개의 특질을 오랜동안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1. 용기

최윤덕은 어려서부터 담이 아주 큰 사람이었으며 그의 무예솜씨는 출중했다고 한다.   특히, 말 위에서의 활쏘기는 아주 빼어나고 명궁으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며 창검술도 뛰어났다고 한다.  활로 호랑이를 쏘아 호랑이에 물려 죽은 남편의 원수를 갚아주라고 애원하던 아낙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찿아 장사를 지내준 일화와 여진족 추장 이만주와의 생사를 건 마지막의 일대일 대결은 아주 유명하다.  


  1. 포용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다루는 법을 부하들에게 자세히 사전에 미리 알려주고 포로들을 대하는 그의 너그러운 자세를 보면 불필요한 살상을 금지하는 그의 드넓은 아량과 호탕한 기질을 볼 수 있다


  1. 인내

전투를 준비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자신에게 완전한 믿음이 서기 전까지는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확신있게 전투를 개시할수 있을 때까지 치밀하게 계획한다.


  1. 준비

전투에 대비하여 늘 세밀하게 준비하고 병사들의 군사훈련을 철저히 하였다.   그의 별명 ‘축성대감’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늘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론에 앞서 그는 왜구의 침략을 미리 예견하고 전국에 邑城을 쌓을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또 실제로 전국을 돌며 축성을 지휘감독하였다고 한다 [1, 5].   


  1. 타협

그는 조정회의를 통해 특히 서북면의 여진족 침입을 격퇴하기 위한 최적의 대규모 공격시기를 결정하는데 조정에서의 수많은 조정회의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고 타협하면서 확실한 공격시기가 올 때까지 그의 뜻을 결코 굽히지 않으며 기다렸다고 한다.  


  1. 결단

한번 확신이 서면 전투에서 그 공격하는 방법과 시기를 부하들에게 정확하게 주지시키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속전속결로 공격을 수행하여 최소한의 아군희생으로 적을 확실하게 궤멸하곤 했다.


  1. 겸손

세종이 아주 아끼는 신하로서 세종은 최윤덕의 자질을 높이 보아 늘 그를 고위직에 중용하려고 했으나, 최윤덕은 늘 그럴 때마다 세종의 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곤 하였다.    


  1. 자비

전투를 통해 사로잡은 포로들을 그는 매우 자비롭게 대했으며, 관리로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의 요청들도 원만하게 처리하고자 늘 노력했다고 한다. 


  1. 효도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성장하면서도 매우 소문난 효자였으며 늘 전장에 많이 나가있는 아버지 최운해를 대신하여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모두 잘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친모와 계모에 대한 효심 모두 똑같이 지극했다고 한다.  


  1. 충성

세종은 최윤덕의 충성심과 효심을 귀히 여겨 늘 그를 아꼈으며 그와 사심없이 국사를 의논하고, 특히 국방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그를 신임하며 그의 통천최씨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충효의 전통을 글로 써서 남길 정도록 각별한 그에 대한 군주로서의 사랑을 표현했다.    

최윤덕 장군의 본관 통천 최씨 가문을 칭송한 조선 세종대왕 어록

(출처: 위키백과 ) 최윤덕 장상의 본관 통천 최씨 가문을 칭송한 조선 세종대왕 어록 [1]



  1. 솔선

최윤덕은 담대한 사람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이 직접 나서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다.   그가 조선 태종과 함께한 전투에서 많은 휘하 장수들이 渡江에 주저할 때, 담대히 앞에 나와 도강을 성공적으로 맨먼저 성공한 일화는 아직까지 전해 오는데 이 일로 최윤덕은 용감한 장수로서 더욱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고 한다.   


  1. 융합

최윤덕은 무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틈틈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양장공 최운해가 어렸을 적부터 그에게 문무를 동시에 중요시하여 시킨 가정교육에 기인하는데, 그는 무예놀이를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 최운해는 어릴 적 학문을 게을리한 최윤덕을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에게 부탁하여 일찌기 그에게 경서와 역사서등을 공부시킨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문무의 균형적인 수양을 통한 인격연마에 힘을 쏟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인이었지만 본인이 고사함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전격적인 신임을 받아 조선 최초로 무인이면서 정승의 자리인 우의정과 좌우정에 올라 將相으로 불리웠으며 국사를 무리없이 처리했다고 한다.

필자가 좋아하는 그의 짧은 시를 여기 한 수 소개한다.  


好雨留人古古遲 當窓盡日聽江聲 / 호우유인고고지 당창진일청강성

좋은 비는 사람을 만류하여 떠날 길을 늦추니, 창가에 종일토록 강물소리 듣고있네.


  1. 노력

최윤덕은 지독한 노력가였다.  그는 평생 무예연마를 쉬지않고 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말년에 그의 건강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몸이 불편할 때에도 그는 그를 전혀 핑계삼지 않았고, 전장에 나가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철저하게 성공적으로 완수하는데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1. 선견

최윤덕은 북방 여진족의 잦은 변경 침입과 왜구의 대규모 조선침략 정책을 최전방의 일선 지휘관으로서 그의 오랜 국방경험을 통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대규모 조선침략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150년 정도 앞서 예견하고, 그 방비책으로 전국에 주요 邑城을 신축하거나 개축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몸소 전국을 돌며 축성사업의 중요성을 늘 일깨웠으며 운명하던 날까지도 그는 국가의 안위를 매우 염려하였다.    


  1. 자애

최윤덕은 전투에 있어 나약한 어린아이나 아녀자, 일반 백성, 심지어 포로까지 매우 자애롭게 대했으며, 전투 전에 부하직원들에게 불필요한 살생을 결코 하지 말것을 신신당부 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투지침은 지금까지 족보를 포함하여 기록으로 자세히 내려온다.  그리고 그는 최고책임자로서 부하병사의 희생을 늘 최소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또 솔선수범하였다.


  1. 근검

그는 짬짬히 틈을 내어 옷을 바꾸어 입고 텃밭을 가꾸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어떤 때에는 농사하는 최윤덕을 보고 그가 원님인지 모르고 관청에 온 사람들이 지나쳤던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이는 그의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잘 보여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갈 때는 단지 한명의 동자만을 데리고 말을 타면서 갔다고 한다.   


  1. 책임

최윤덕은 모든 맡겨진 일에 대한 확신이 서면 그 일을 책임자로서 철저하게 책임완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그를 가장 아끼는 신하의 한명으로 대했고, 세종 승하 후에 종묘에 세종의 제1신하로서 함께 배향되었다.  


  1. 지략

최윤덕은 어떠한 일을 처리할 때 마다 (특히, 쓰시마 정벌 계획과 여진족 본거지 섬멸과 같은 대규모 공격계획)에 있어서 아군의 압도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날씨와 계절과 같이 변하는 여러가지 요인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관련자들과의 지속적인 토론과 타협을 통해 가장 이상적이고도 현실가능한 공격계획과 수비계획을 수립하고 또 실행하였다.   

 

  1. 단련

최윤덕은 무예 창검술과 궁술 등 여러 무예를 무인으로서 평생동안 열심히 연마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馬上弓術 (말 위에 타면서 활쏘기)는 소문난 명궁으로서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어릴적에 벌써 단 한발의 화살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의 실력이었으며, 그에 훌륭한 무예 솜씨는 특히 북방 여진족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입증 된 바 있다. 


  1. 호연지기 
  2. 정렬공 최윤덕 장상의 지도력에 대한 교훈 (2 of 2)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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