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내 마음의 수필] - 명령 (命令)

2021.07.10

[내 마음의 수필]  


명령 (命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님에게서 들은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버님은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셔서 거의 집에 들어오시는 때가 없어 어머님으로서는 늘 노심초사 (勞心焦思) 하시며 이제나 저제나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과 함께 아버님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시는 일 밖에는 별로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곤 없으셨다고 한다.


한번은 아버님께서 작전중에 공교롭게도 집을 거쳐가시게 되어 잠깐 어머님를 뵈러 집을 들리신 모양이었다.   텁수룩한 수염, 흙투성이 전투복, 세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얼굴과 지저분한 군화차림에 총을 든 아버님의 모습을 보시는 순간 어머님은 놀라서 그만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셨다 한다.  ‘여보 나야!’ 하시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 다시 보니 아버님이셨다고 한다.  어머님 말씀에 한눈에 ‘반란군’의 행색이어서 아버님이 예고없이 나타나셨던 그 때는 ‘정말 이제는 꼼짝 없이 죽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여순반란사건 중에는 빛고을인 광주 (光州)에서 근무를 하셨는데 상사 (上司)가 아버님을 매우 아끼셨다고 한다.  어머님이 전하시는 바로는 광주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자리에 있는 훈련소에서 기본 전투훈련만 받은 경찰들이 트럭에 실려 아침에 여수와 순천으로 가면 저녁무렵에 주검이 되어 트럭에 다시 실려 왔다고 한다.  상사의 명령 (命令)에 의해 기본전투교육을 받은 후에는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사상자가 많이 났다고 한다.  이러한 처지를 뻔히 알아도 명령이니 불복종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버님도 그러한 처참한 상황에서 예외가 아닌 입장이셨는데, 직속상관이 어느날 아버님을 부르더니 대뜸 ‘자네는 (전투지역에) 보내기 너무 아까워.  여기 남아서 교육을 담당하게.’라고 명령 (命令)하더란다.  그래서 교육을 담당하게 되셨는데 교육을 받은 교육생들이 주검이 되어 계속 돌아오는 기막힌 상황에서 ‘명령 완수(命令 完遂)’를 해야하는 아버님의 도저히 말로할 수 없는 처참한 심정은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짐작이 간다.  


아버님을 너무나 아끼던 그 상사는 나중에 아버님과 함께 생명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의 전투에 다시 참전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자신의 혁대에서 권총을 풀어 아버님께 주면서 ‘너는 살아야한다.’하며 ‘빨리 위험지역을 빠져 나가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사지 (死地) 에서 두사람 모두 무사히 극적으로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나중에 모두 민간인이 된 후에도 두분은 부하 (部下)와 상사 (上司)의 관계를 넘어서 평생친구로서 아름다운 교분을 유지하다가 가셨다.  


한국동란 때는 외할머님이 전투에 앞서 전투복을 손수 손질 해 주셨는데, 인민군과의 치열한 교전을 치르시다가 엄청난 화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다가 나중에 전투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외할머님이 전투복 바지에 손수 기우신 솜이 방탄 (防彈)기능을 하여 총알이 다리에 관통하지 않아서 사셨다고한다.  장모님의 지극한 사위사랑이 아버님의 목숨을 건지신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여름날 장롱에서 우연히 꺼낸 아버님의 각종 무공훈장 (武功勳章)이나 종군기장 (從軍記章)들이 멋있고 너무 신기하여 그들을 보여 드리면서 각 훈장이나 기장의 의미를 여쭤 보았는데, 아버님께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고 단지 ‘그러한 훈장이나 기장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만 하시며 나의 눈을 응시하신 기억이 난다.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신 아버님은 생 ()과 사 ()의 문제에 대해 매우 초연하셨던 것 같다.  수많은 전공 (戰功) 에 대해 자부심이 크실만도 하시건만 이 모든 이야기들을 나는 어머님께로부터 들었고, 지금은 계시지 않는 아버님을 생각하며 그 이야기들을 여기에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는 바이다.     

                 

아버님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 (忠誠心)이 누구보다도 매우 강한 분으로 기억되는데 이는 내가 생각하기에 어렸을 때부터 충효사상 (忠孝思想)을 바탕으로한 유교식교육을 조부모님에게서부터 철저히 받으시고 특히, 역사상 수많은 걸출한 무인 (武人)을 배출한 통천최씨 (通川崔氏) 집안의 내력에 늘 무한한 자부심 (自負心)과 긍지 (矜持)를 가지고서 생활하신 것 같다.  


해마다 한국의 현충일 (顯忠日)과 미국의 Memorial Day가 되면 우리나라와 미국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선조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평생을 조국수호를 위해 온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바치신 아버님과 아버님의 뒷바라지와 나의 여덟 형제자매들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한국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온전하게 키워주신 어머님의 가없는 사랑과 은공 (恩功)을 기리며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1년 7월 19일

崇善齋에서

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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