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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동래정氏 명당과 도깨비

2023.02.27

 



            동래정氏 명당과 도깨비   


 동래정씨는 조선의 3대 문벌 가운데 하나이다. 전주이씨와 안동김씨 못지않은 대단한 집안으로 동래에 그 시조 묘가 있었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정문도(鄭文道)인데 이분은 본래 읍에 소속되어 있던 아전 이였다. 당시 개경에서 파견된 현령을 모시는 게 그의 일이였다. 현령은 풍수지리의 대가였는데 이를 발설하지 않고 은밀히 동래일대의 산을 보러 다녔다. 정문도 는 별 생각 없이 현령을 수행하며 따라다녔다. 현령이 주로 찾은 곳은 현의 서쪽에 위치한 화지산 이였다. 현령은 화지산 일대를 둘러보다가 내려와서는 언제나 한 자리에 앉아서 사방을 바라보다가 고개만 끄덕이고 되돌아오곤 했는데 “아깝다! 아까워! 참으로 안타깝구나!”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중에야 정문도는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그런데 현령이 왜 아깝다는 한탄을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그 후 현령은 내직으로 영전이 되어 개경으로 돌아갔다. 외직에서 내직으로 가는 것은 큰 영전이여서 현령은 매우 기뻤고 그 동안 자신을 뒷바라지하던 정문도를 불러 정문도도 눈치 챘던 그 자리가 명당 터임을 알려주면서 “너무나 아깝게도 이 터는 명당임에 분명 하지만 외지 사람인 나는 이 터를 쓸 수가 없는 자리네! 주인봉(명당 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 이 터와 너무 가깝기에 대대로 이 터에서 멀어도 30리 이내의 사는 자라야 이 터를 쓸 수 있기에 한탄을 한 것이네! 즉 포태법(胞胎法)상 향리용지는 명당이지만 이런 제한이 있기에 그렇다네!”라고 하였다. 정문도는 그제야 현령이 한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문도는 이 자리에 정성껏 지표를 해놓고는 늙어서 죽게 되자 아들 정목에게 유언을 남겨 자신을 꼭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신신당부한 뒤 숨을 거두었다. 


정목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묘지에 가보니 봉분이 마구 파헤쳐져 있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잡놈의 시레배새끼가 남의 아버지 묘를 이렇게 파헤쳤단 말인가?” 정목은 크게 놀라고 분했지만 누구의 짓인지 모르니 어쩔 수없이 봉분을 수습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가보니 전처럼 봉분이 또 파헤쳐있었다. 펄펄 뛰며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봉분을 수습하고 난 뒤, 두 차례씩이나 봉분들 파헤친 범인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어떤 놈의 장난인지 반드시 잡아서 요절을 내겠다고 결심을 하고 몇날 며칠을 밤을 세워가며 묘지주변에 숨어서 봉분을 파헤치는 놈을 잡기로 했다. 몇날 며칠 잠복을 하다 보니 어느 날 드디어 깜깜한 한밤중에 한 떼의 사람들이 두런두런하며 나타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사람이 아닌 머리에 뿔이 달리고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있는 도깨비들 이였다. 


도깨비들은 정목이 숨어서 지켜보는지도 모르고 저들끼리 떠들어댔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감히 금관(金棺)도 안한 놈이 자꾸 들어오는 거야? 파헤쳐 버리자!” 도깨비들은 다투어 봉분을 파헤쳤다. 정복은 그제 서야 이 자리가 그냥 명당 터가 아닌 아무나 차지할 수없는 대지대혈 임을 알았다. 정목은 고민에 쌓였다. 금관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이를 어떻하나? 하는 걱정 이였다. 정목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정목은 아버지 시신이 담긴 관을 황금색 보리짚단으로 싸서 되묻었다. 금관을 할 수없는 처지였기에 황금빛 색깔이 나는 보리 짚단으로 도깨비들을 속여 넘기기로 한 것이다. 관을 묻고 며칠을 지켜보았으나 다행히도 다음부터는 아무 탈도 없었다. 영남지방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이 길지(吉地)는 이리하여 동래정씨 집안의 차지가 되었다.


이 자리는 쓰고 나서 정씨 가문은 번성했다. 우선 아들 정목이 과거에 급제하여 좌복사(左僕射)를 지냈고 손자는 예부상서를, 증손 정서는 인종의 동서로서 벼슬이 내시랑중까지 올랐다. 정서는 유명한 십규체 향가 형의정과정 곡을 지은이로 유명하다. 정서는 예종 때 참소로 동래에 귀양을 갔는데 문학과 문장에 뛰어난 문인 이였던 그는 임금이 그를 곧 소환하겠다고 했는데 오랜 세월 부르지 않자 토고개 조금 못 미친 곳에 정자를 짓고 참외를 심고서 거문고를 뜯으며 군주를 그리워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참외 정자를 뜻하는 [과정]은 그의 호였다. 어째든 정문도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갈수록 번창해 나갔다. 이리하여 이조 오백년 동안 정승이 열일곱 명, 대재학 두 명, 문과 급제자가 한 집안에 무려 백구십팔 명을 낸 그야말로 명문거족이 되었다. 정문도의 후손 중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순홍은 나라 돈을 한 푼도 축내지 않은 청렴결백한 이로 유명한데 이이에게는 이런 일화가 유명하다.


한번은 집수리를 하면서 인부와 다투게 되었다. 양반은 돈 문제로 사람들과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고 돈을 손에 쥐고 흥정을 하는 일도 없으며 돈을 입에 올리는 것도 꺼려했는데 참으로 의외의 일이였다. 또한, 한 나라의 정승이나 되는 양반이 상놈과 다투다니 체면이 달린 문제였다. 그의 아들이 옆에서 이를 보다 무안한 나머지 한 말씀을 올렸다. “아버님! 대단히 외람된 말씀이오나 정승자리에 계신분이 인부와 품삯을 가지고 다투시면 체모를 상하지 않으시겠는지요?” 완곡한 아들의 말에 정홍순의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정승으로 일국의 재정을 집행하는 내가 품삯을 과하게 주게 되면 나라의 예가 되어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법이다. 이는 바른 재정가가 취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좁은 소견을 크게 부끄러워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대장간에 가서 깨진 한 푼짜리 엽전을 땜질해 달라했다. 엽전 한 푼을 땜질해서 수리하는데 두 푼이나 되었다. 대장장이가 땜질을 해달라는 정홍순에게 “대감마님! 두 푼을 들여 한 푼을 건지면 손해가 아닌지요?” 속으로는 “정승의 대가리가 닭대가리가 아니고서야 이런 바보짓을 하나?”라고 하며 비웃으며 물은 말이다. 세상의 어떤 바보도 이런 짓은 안할 것이다. 


정홍순은 태연히 대답한다. “엽전을 제조해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냐?” 이 말에 대장장이가 “물론입죠!”라고 답하자. “허면, 나는 한 푼을 잃더라도 나라에는 한 푼의 이익이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공익이 아니더냐?” 대장장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엽전을 정성껏 땜질해 주었다. 한 나라를 생각하는 대인은 소소한 이익에 눈이 멀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가서이다. 청백리로 유명한 정순홍 말고도 이 가문에는 수없이 많은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조인 정문도의 행운(명당을 현령으로부터 양보 받은 것)과 그의 아들이 슬기롭게 황금색 보리짚단으로 도깨비들을 속인 일로인해 이런 가문의 영광이 생겨난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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