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udowon님의 다른글 더 보기 :: 총 1042
목록 닫기목록닫기 목록 열기목록열기
문화/창작

死線(사선)을 세 번 넘다!

2022.04.11

 



             死線(사선)을 세 번 넘다! 


 ‘사람은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고로 나는 죽는다.’ 이러한 연산법이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생할 수 없고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 아무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탄생의 기쁨은 양(陽)이다. 죽음의 슬픔은 음(陰)이다. 양이 있으면 반드시 음이 있고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다. 고로 음양은 지극히 반대개념이면서 하나의 카타고리 안에 있다. 음양은 반대개념이면서 동일한 개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음과 양은 번갈아 교차한다. ‘달도차면 기운다’ ‘쥐구멍에 볕들날 있다’라는 말은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죽음에 대해 동양인들은 지극히 감정적인 슬픔에 젖어들고 서양인들은 합리적인 대처법에 집중한다. 서양인들의 경우 감정적인 슬픔에 젖어들기 보다는 이 죽음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대처하느냐는 이성적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짙다. 


이곳 미국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어떤 한인의사가 쓴 글에서 보니 말기암이라는 진단을 알려주었을 때 한인 환자는 반드시 물어보는 말이 ‘얼마나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병원에 근무하면서 지켜본 결과 서양인 환자들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한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만이 알지 어찌 의사가 알 수 있냐?’ 라는 생각 때문이란다. 금방 죽을것 같던 환자가 수 십 년 더 사는 경우도 있고,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던 환자 상태가 급히 악화되 금방 죽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이런 생각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얼마나 오래 사느냐?’의 문제보다는 ‘사는 동안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인간 말종 쓰레기 짓을 하면서 “저런 인간은 왜 빨리 안되지나?” 라는 욕을 먹으며 100살 넘게 사는 것보다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아까운 사람을 이리도 빨리 데려가시다니!” 라는 애도를 듣는 짧은 삶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필자도 세 번 죽을 뻔한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아주 어려서 홍역을 앓을 때였다. 옛날에는 자식도 많이 낳았고 홍역으로 많이 잃었다. 아주어려서 죽는 아기들이 많아 당분간 죽나 사나? 를 살펴본 뒤 호적에 올리는 부모들이 많았다. 몸이 펄펄 끊는 고열 속에 윗방이라 불리던 냉방에 던져진 채 홀로 아픔을 견뎌야했다. 동경 유학까지 다녀오고 해방 후 경무대 경호실 경찰 간부까지 지내신 아버지는 사직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자 실의에 빠져 폐인처럼 방황하셨다. 이때 아버지는 몇 년 째 돈 벌어온다는 핑계 하에 가출 중이셨고 혼자 몸으로 어린 6남매를 굶겨 죽이지 않고 살려야하는 어머니는 늘 행상에 남의 집 빨래일에 바빴으니 여러 자식 중 하나 잃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굶어서 떼죽음 나는게 더 큰 문제였다. 살던 죽던 그것도 다 제 팔자라는 생각에서였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나이지만 무척이나 아파 정신이 없던 중에도 혼자라는 것이 무척이나 무섭고 외로웠다. 필자의 고질병인 대인기피증과 선천성 외로움 증후군은 이때 생긴듯했다. 대인기피증과 외로움은 반대 개념이면서도 필자에게는 하나로 작용됐다. 몇 날 며칠은 앓은 뒤 살아서 기어 나왔다. 어머니는 말없이 일하는 집에서 가져왔다며 바나나라는 과일을 축하의미로 주셨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때 바나나 껍질이 새까매서 필자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바나나는 검은색인줄 알았다. 그 감격을 학교에 다닐 때 그림으로도 그려 놓았는데 ‘까만색의 바나나’였다. 그런데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알고 보니 바나나는 노란색이었다. 바나나가 상한 상태여서 부잣집 마나님은 ‘일하는 아줌마’인 어머니에게 선심을 쓴 것이었다. 그때는 그 정도로 바나나가 귀했다. 검은색 바나나에 얽힌 첫 번째 죽음극복이었다. 


두 번째 위기는 불현듯 예고없이 왔다. 대학재학시절 자취방에서 연탄 gas를 마시고 부엌바닥으로 꼬꾸라진 것이다. 이때는 부엌구조가 매우 낮고 (푹 파인듯한 구조)방이 높은 집이 많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여는 순간 기절해서 부엌바닥에 꺼꾸로 처박힌 것이다. 병원에 실려가 산소통속에 들어갈 수 있어 몇 시간 만에 겨우 살았다. 이때는 연탄가스로 죽는 사람이 주위에 하두 많아 죽었어도 뉴스감도 못되었을 것이다. 이때 아랫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윗이빨들이 아랫입술 아랫부분을 뚫고 나가면서 입술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때 많은 이들을 잃었고 나이가 들자 이때 충격으로 성했던 이들도 하나 둘 힘없이 빠져나가 이 사고로부터 35년 이상 흐른 지금 이제 결국 틀니신세가 되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틀니신세가 된 사연이다. 이때 주인집은 재수없다고 난리치며 겨우 이빨치료비만 조금 보태주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는 소리지만 그때는 다 무지해서 그런 줄 알고 말았다. 


진짜 위기는 필자가 어느 정도 예측했던 시점에서 왔다. 필자가 필자 스스로의 운을 전부터 예측해보니 2011년, 2012년인 신묘년과 임진년이 필자에게 아주 위험한 해로 나왔다. 주변의 아주 가까운 몇에게는 이때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했지만 일상 업무는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해나갔다. 갈 때 가더라도 일하다 쓰러져 가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지러운 증세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머리도 띵하게 아찔아찔했다. 그러더니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앉아있으면 그나마 괜찮았지만 서서 걸으려면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귓병원에 가서 혹시 귀의 이상으로 어지럼증이 있는 것은 아닌가? 검사도 해 보았다.(이 병원 의사도 필자 손님이다) 그 뒤 이런저런 검사도 해 보았다. 옛날에는 결코 병원을 다니는 일이 없었다. 웬만큼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필자의 무식한 지론이었다. ‘


‘몸에는 병에 대항하는 항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능이 있기에 가능한 한 병원은 무조건 피하는게 좋다’는 평소 신념대로 병원가기를 거부했다. 평생 감기한 번 심하게 앓아보지 않은 체질이여서 병원 갈 일도 없었다. 헌데 이런 심각한 지경이 되자 병원에 가자는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아파보았기 때문이다. 6개월 정도 내리 한약을 지어먹으며 양,한방 치료를 병행했다. 결국은 살아났다. 치료의 후유증으로 몸무게는 15kg이상 늘어 옛날의 샤프하면서 날카로운 눈빛은 사라지고 얼굴이 달덩이만해지고 배가 불룩나와 금복주 상이 되었다. 목욕탕에 가서 몸을 비춰보면 ET가 따로 없다. 배는 남산만하고 팔다리는 가늘어진데다가 얼굴은 저팔계가 된 이상한 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너 누구냐?   이놈!”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