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July 4th, 2024)
캘리포니아 방문중 만난 고마운 친구들
나는 사교성이 별로 없고, 성격도 명랑하지 못해서 친구가 별로 없다. 내가 좋아하고 친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내가 연락하는 것을 싫어 하는 눈치여서 나도 멀리하게 되니 점점 외로운 외톨이가 되어가나 싶어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 내 말을 들어 주고,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친구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살고 있는데,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도 잘 받아 주니 참 고맙다.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내가 목원대학에 입학하여 겁을 먹고 긴장해 있을 때 재미있고 우스운 얘기로 나를 포함한 동기들을 많이 웃게 해 준 참 좋은 친구이며 인간성 좋은 박용삼목사이다.
미국에 같이 살아도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는데, 얼마전에 캘리포니아에 와서 같이 캠핑을 가자고 해서, 이번에 교회와 병원에 일주일 휴가를 얻어 몇년만에 캘리포니아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중 그간 만나지 못했던 분들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클레어몬트 대학원 기숙사에 살 때 쌀부대를 짊어지고 내 방에 내려 놓고 웃으며 가시던 박우성 선배 목사님과 사모님과 늘 웃으며 다정하게 대해 주시던 장근성 목사님과 사모님, 위스칸신에서 목회하시고 캘리포니아에서 은퇴생활을 즐기시는 권혁순 목사님을 뵙고 점심 식사를 대접해 드리며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안영일형은 마산고등학교에 합격은 하였으나, 가난한 집안형편때문에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명문 마산고에 입학하지 못하고, 후기인 창신공고에 수석으로 입학한 형이었는데 이번에 만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영일형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때 나한테 수학을 한, 두번 가르쳐 주었는데, 그 후로 만나지 못했는데, IMF 이후, 미국에 이민을 와서 옷가게를 하며, 권총강도를 만나는 등 산전수전을 겪고 이제는 좀 안정된 노후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인생을 빗나가게 살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신앙심으로 험난한 인생을 헤쳐 나왔다고 했다.
친구 박용삼 목사는 작은 한인 이민 교회를 섬기며 연로하신 어머니와 장모님을 잘 보살펴 드리고, 하늘나라로 보내신 후, 십여년전 부터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여 그간 마라톤 풀코스를 열번이상 달린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 되어 있었다. 30년전 부터 캘리포니아, 네바다를 비롯한 유명관광지를 몸소 섭렵하여, 캘리포니아 관광에 거의 박사수준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 Seal Beach에 있는 아담한 은퇴집을 구입하여 멋지게 꾸며 놓았는데, 아쉬운 것 하나없이 풍요롭게 잘 사는 것 같았다.
박목사를 통해 목원대학 선배 김목사님댁에 가서 사모님이 만들어 주신 감자탕과 아구찜을 먹으며, 마산 회성교회에서 목회하시던 김목사님이 30년전에 이민목회를 오셨다가, 선교후원을 약속했던 한국의 교회가 일방적으로 후원금을 끊어 고군분투하며 목회하다가 일찍 은퇴하고 생활전선에서 뛰어들어 이제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녀들을 대학 교육시키고, 딸과 사위가 변호사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목사님과 박목사랑 한국식당 먹자 코너에서 짱뽕과 짜장면을 먹고, 한국식품점에서 삼겸살과 고구마를 산 후, St. Clemente의 바닷가에 있던 주립 캠프장에서 텐트를 치고 모닥불에 가마솥 뚜껑을 얹어 놓고 두꺼운 삼겹살과 김치를 올려 익힌 후, 먹어 보니 예상외로 맛이 있었다. 박목사의 말로는 집에서는 불이 약해 이런 맛이 나지 않고, 모닥불의 강한 불때문에 삼겸살이 맛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닥불을 보며, 예전 청소년때 교회 수양회에서 짝 사랑하던 여학생을 떠 올리며 불렀던, 박인희씨의 철학적인 노래, “모닥불”을 불러 보았으나, 두 사람은 딴 생각을 하는지 내 감흥에 젖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김목사님이 목원대학 신학과4년 졸업반 시절에 자신의 자취방을 비어 놓고 나갔을 때 동기생과 같은 동기인 여자친구가 자취방에서 자다가 연탄가스사고로 질식사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45년전 쯤 전의 일이기는데 해도 여전히 슬픈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선배의 친동생이던, 내 3년 선배 한목사님은 차를 후진하다가 자기 어린 아들을 보지 못하고 치어 죽인 슬픈 비극이 또 생겼다고 했다. 43년전, 기숙사에서 몇번 얼굴을 본 그 선배님이 장차 그런 비극을 당하게 될 줄 그 때는 상상도 못했는데, 살다 보면 이런 기막힌 비극도 겪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인 크리스챤 뉴스위크란 한인 교계신문을 발행하시는 조명환 은퇴목사님이 LA오면 골프를 같이 치자고 해서 갔더니, 감리교 원로 두 목사님이 나오셔서 같이 골프를 쳤는데, 내가 못 쳐서 원로 목사님들의 기분을 좋게 해 드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조목사님이 “위스칸신에서 조목사가 와서 환영하는 의미로 저녁은 내가 내겠다”고 하셔서, 중국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이름없는 시골 목사인 나를 대접해 주시는 조목사님의 따뜻한 마음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내가 두서없이 쓰는 글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이대기독교 학과 출신의 팔순의 안권사님이 나한테, “LA 오면 연락하세요. 내가 불고기에 냉면 살게요.”하셔서, 제가 “권사님은 평생 목사들 식사 대접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목사인 제가 권사님에게 점심을 사고 싶습니다. 그래야 공평하지요.”했더니, 호랑이 같으신 권사님은, “그럴려면, 오지 마세요!”하시며 쌔게 나오시길래, 나는 깨갱하며 꼬리를 내렸다. 권사님은 “오실 때 조목사님 친구 목사님도 모시고 오세요.”하시길래 박목사도 함께 가자고 했다.
권사님은 아버님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625때 공산군에 납북된 후 그후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했고, 권사님의 어머니는 유성으로 피난을 간 후, 거기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풍금을 치며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목원동산에서 새로 생긴 대전 감리교 신학교의 일회 졸업생이 되었다고 했다. 안권사님의 어머니인, 노춘풍 여자 전도사님은 남자 목사들에게 무시와 설움을 받으며, 서울에서 목회를 하다가, 딸을 도와 주려 미국에 이민을 와서 60세 운전면허를 따서 80이 되도록 한인 교회에서 여전도사님으로 봉사하다 90을 넘기고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했다.
주일날에는 27년전에 내가 잠시 교육목사로 있던 교회에 가서 당시 담임목사님과 목사님의 남편인 장로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서울대학 수의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수의과로 계신 장로님은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의 여자목사님을 도와 한인이민 교회를 이끌어 가셨는데,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신 기억이 있어서 옛날 생각이 나서 인사 드리러 갔는데, 예배 마친 후, 교회식당에서 제공해 주신 콩나물 비빔밥에 미역냉국과 김치를 먹고 작별 인사를 드리고 렌트카를 공항에 반납한 후, 비행기를 타고 덴버를 거쳐 밀와키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의 차로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