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인생의 종착역

2024.04.27

                                                                   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인생의 종착역


우리 아버지는 40대 중반에 암으로 돌아 가셨다. 그때 나는 네살이어서 색바른 흑백사진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어머니는 어찌해서라도 아버지를 살리려고 삼년동안 병구완을 했으나, 당시 의술로는 암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머니는 임종을 맞은 아버지에게 “자식들도 잘 크고 있고, 살만 한데, 병을 이기고 같이 살자. 어찌해서라도 살리겠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처군아, 처군아, 니 말은 고맙지만, 내 명이 이것 밖에 안되는데, 어떡 하겠느냐? 이제 자식들은 모두 네 차지가 되니, 자식들 커는 것 보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라. 아이들이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 기죽지 않도록, 학교에서 돈을 가져 오라 하면, 돈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어머니는 형님들과 누님들이 공장에서 일해서 벌어 온 적은 돈으로 일곱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늘 가난했지만, 내가 학교에서 전과책을 사는데 돈이 필요 하다고 하면, 손수건에 꽁꽁 싸서 숨겨 두었던 돈을 내어 주며, “아버지가 아이들 기죽지 않게, 학교에서 필요한 돈을 주라고 했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위스칸신주의 미국 교회의 목사로 자리를 잡자,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초청해서, 목사관에서 일년에 육개월을 같이 지내며, 텃밭에서 채소도 가꾸시고, 봄에는 고사리와 취나물도 뜯고, 가을에는 도토리도 주워서 도토리 묵도 만드셨다. 어머니는 미국에 열번을 다녀 가셨고, 이웃 사람들에게서, “아들 덕에 미국을 이웃집 드나드는 할머니”란 말을 듣고 과부로 가난하게 살던 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하신 듯 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뉴욕, 시카고, 나이아가라 폭포, 하와이, 일본 관광을 시켜 드릴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런 자랑을 했더니, 어느 선배 목사님은, “조목사가 부럽네. 우리 때는 미국에 정착하느라 여유가 없어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미국에 한번도 못 모시고 어머니가 돌아 가셨네.”라고 쓸쓸히 말씀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87세까지 사시다 진주 누님 댁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다. 


성경말씀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있다. (벧전1:24,25) 모든 인생은 풀과 같이 싱싱하게 자라나고 성장할 때가 있는가 하면, 꽃이 활짝 핀 후에 서서히 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장성기를 지난 후, 노쇠하고 죽음을 맞는 자연적인 과정을 겪게 된다.


며칠전에 간호사로 부터 환자 한 분을 방문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그 병실에 가 보았다. 머리가 새하얀 백인 노인이 우울한 모습으로 나한테 말했다: “나는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I’m waiting to die.) 그 영감님은 92세로 약간의 치매끼가 있는 것을 빼고는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였는데, 왜 그런 우울한 말을 할까 궁금해 졌다.


그 분은 아무도 말상대를 해 주지 않아 외로웠던지, 나한테 인생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위스칸신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트럼펫을 배워 공군 군악대에 입대했는데, 자신은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부는 일을 좋아 했으나,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군목에게, “우리 아들은 몸이 약해 군대 근무를 할 수 없으니, 의가사 제대를 시켜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군목은 아들을 군인병원에 보내어 검사를 받게 한 후, 군의관으로 부터 “이 병사는 여러가지 알레르기 증상이 있어, 군복무를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에, 의가사 제대를 추천한다”는 판정을 받고 군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 왔다고 했다.


우체국에 취직하여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고, 지금의 둘째 아내와 결혼하여 평생을 살았는데, 큰 아들이 50대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고, 현재의 아내는 치매가 걸려 요양병원에 수용되어 있고, 자신도 치매판정을 받아, 모든 법적, 재정적인 결정을 딸이 하는데, 딸이 “아버지는 치매가 있어, 집에 혼자 계실 수 없다”고 하여 “지금 병원에 와 있는데, 돌아갈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죽기만 기다리는 신세”라고 했다. 


치매 판정을 받으면 법적, 재정적 자율권을 잃고, 가족이나 법적 후견인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겨야 하니, 노인들이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지기 쉬울 것 같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평소에 잘 해야 나중에 노인이 되었을 때 자식들이 좋은 양로원에 보낸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도 들어 보았다.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를 가르치는 은퇴 여자 목사님은 70중반의 남편이 치매끼가 있어 최근에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치매끼가 있는 남편을 집에서 몇 년을 간호하며 보살펴 주었지만, 치매가 점점 심해져 혼자서 보살피기에 힘든 지경에 이르러, 힘든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 여자 목사님은 우리 집사람에게, “외롭지만, 이제사 맘 놓고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치매끼가 있는 남편에게 신경 쓰느라 그간 몇년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한 모양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병든 남편을 집에서 보살펴 주지 않고, 요양병원에 보내어 버려 죄책감도 있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우리 교회의 70대 백인부부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70대의 남편이 겉으로는 멀쩡한데, 특별한 치매증상이 있어서, 갑자기 화를 내거나 아내를 밀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 지금은 남편이 치매전문 요양병원에서 살고 있다.


나는 대화가 불가능한 중증의 치매환자들을 종종 봤기 때문에, 그 남편을 방문했을 때 겉으로 멀쩡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어서, 치매환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 였다. 그 남편을 방문한 후, 우리 교회 성경공부 시간에 나는 깊은 생각없이, “오늘 요양병원에 있는 누구 남편을 방문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상태가 좋은 것 같더라.”라고 했더니, 성경공부 시간에 참석했던 94세 되신 할머니가 집에 가서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목사가 당신 남편을 방문하고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 아내 되는 분은, 내가, “멀쩡한 남편을 자기 편하려고 요양병원에 보내어 버린, 매정한 아내”라고 매도한 것으로 곡해를 해서 나한테 화가 나 있다는 말을 제 삼자를 통해 듣게 되었다. 어느 은퇴 목사님이 후배 목사들에게 “교인들에게 늘 말조심을 하라. 목사가 방귀를 뀌면, 교인들은 “목사가 똥쌌다”고 하는 수도 있으니, 목사는 교인들에게 늘 말을 조심해서 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치매가 걸린 남편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며 집에서 함께 사는 것도 힘들고, 겉으로 멀쩡한 치매환자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내어도, 주변으로 부터 “무정하고 무자비한 아내”라고 욕을 먹을 수가 있어서, 치매환자를 가진 가족들의 고충이 큰 것 같다. 그분들의 고충을 모르고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실례를 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노인인구가 늘어나는 요즘, 노인성 우울증과 치매도 증가하는 현실을 보며, 인생의 열차가 늘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는 순간이 있음을 기억하고,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최고의 시간임을 깨닫고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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