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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김하태 박사님을 그리워 하며…

2024.06.15

                                      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김하태 박사님을 그리워 하며… 


김하태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내가 목원대학 신학과 3학년때 였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김박사님은 미국 위티어 대학(미대통령 닉슨이 졸업한 대학?)에서 종교철학으로 근 20년 가까이 교수로 가르치시다 은퇴하신 후 목원대학 대학원장으로 오셨던 것이다.


김하태 박사님은 깔끔하신 외모에 두꺼운 안경을 쓰신 전형적인 학자요, 신사라는 것이 첫 인상에 남아 있다. 한번은 신입생 환영회가 축구장 옆에 있던 목원동산 솔밭에서 열렸는데, 사회자가 교수님들을 소개하실 때, 김하태 박사님을 보고는, “저기에…저 안경쓰고 계신 분이 김하태박사님”이라고 소개하자, 모두의 시선이 김박사님쪽으로 향했다. 


김박사님은 “안경” 말이 나오자 마자 벌써 두꺼운 안경을 벗어서 등뒤로 감추셔서, 사람들이 “안경 쓰신 김하태박사님”을 찾고자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을 때는, 이미 김박사님은 안경을 벗은 얼굴로 시치미를 뚝 떼시고 계시므로 모두를 한바탕 웃기셨다.


철학자 니체가, “나를 어떤 말로 규정하면, 나를 부정(否定)하는 것이 된다. (If you label me, you negate me. – Nietsche)”고 했다. 사회자가 김하태 박사님을 “안경 쓴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김박사님은 안경을 벗어 버림으로써 “자신은 안경을 안 쓴 사람도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 같았다.


사람도 한정된 언어에 갇히길 거부하는데, 하나님은 다시 말해 뭐하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교리나, 신조, 신학마저, 하나님을 규정해 보려는 인간의 노력에 불과 할 뿐, 하나님을 다 설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하태박사님은 종교철학 시간에, 노자의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을 가르쳐 주시며, “도(道)를 도(道)라 규정 지으면 이미 도(道)가 아니게 되고, 이름(名)을 붙이면, 진정한 이름(名)이 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언제가 대전 둔산동 아파트에 사시던 김하태 교수님댁에 갔을 때 벽의 액자에 “藝海無邊 (예해무변)”이란 글이 쓰여 있어 그 뜻을 물어 보았더니, 동석하신 송기득 선생님이 “예술의 바다에는 해변(끝)이 없다.”고 설명해 주셨다.


우물안의 개구리에게 “넓은 바다가 있다”고 말해 주면, 개구리한테서 “쓸데 없는 소리 한다”고 욕먹는다는 장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넓은 바다 이야기를 들려 주시던 김하태 교수님은 “우물안 개구리” 같은 우리 신학생들한테서, “김박사님은 목회에 도움도 안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욕을 먹어 가며,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넓혀 주려고 애쓰셨던 것 같다.


김하태 박사님은 김경희 교수님, 이경숙 교수님(이대 신학대학원장)과 우리 조교들을 사랑해 주셔서, 대학원장 시절, 현대 포니 중고차를 구입하셔서, 우리를 싣고, 대전시내의 음식점을 돌며,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며, “친한 사람들 끼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인생의 큰 줄거움이라”며, 이를 “식도락(食道樂)의 신비주의”라 말씀하셨다.


나는 김하태박사님과 가까이서 있을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젊은 교수님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노교수님의 고매한 인품과 정신 문화에 매료되었고, 그분의 학식과 덕망의 향기에 듬뿍 취해서 그분의 옆에 있기만 해도 영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격동의 80년대를 지나며, 학내 분규사태로 학교정세가 복잡해 지자, 당시 목원대 학장이시던 김박사님은 스스로 학장직에서 물러나며, 후임 학장을 찾으라고 하고 미국으로 돌아 가시게 되었다. 


나는 학장실 복도에서 만난 김하태 박사님에게, “그 동안 저를 조교로 써 주셔서 감사드리며, 교수님이 미국으로 돌아 가시게 되어 섭섭하다”고 했다. “그간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에 앞으로 포장마차를 하게 되더라도, 철학을 가진 포장마차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부성 발언을 한 기억이 난다.


내가 92년도에 미국에 유학와서, 96년도에 클레어몬트에 목회상담학으로 박사과정으로 공부할 때, 클레어몬트에서 가까운 La Habra에 사시던 김하태 박사님을 방문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김하태 박사님은 “한국 연속극 비데오를 많이 본다”고 하시며, “나는 요즘 정신이 맑은 아침에는 책을 보며 공부하고, 오후에는 한국 연속극 비데오 보는 낙(樂)으로 살아요. 요즘 한국 연속극 잘 만들어요.”라고 했다.


그후 내가 위스칸신에 미국인 교회 목회하러 나왔을 때, “나도 미국인 목회해 봤는데, 외롭지만 열심히 성도들을 섬겨라.”고 격려의 편지를 써 주셨고, 내가 늦장가를 갔을 때, “늦었지만 행복하게 잘 살으라.”고 덕담을 해 주시던 선생님은 91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기독교와 동양 정신문화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다정하고 지혜로우신 스승님이 늘 고맙고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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