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역술인
조선조 말엽 고종은 이런저런 세력에 휘둘리며 평생을 근심과 번민 속에 살다간 왕 이였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왕위에 올라 성년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군왕의 권위를 행사하지 못했고 이후 왕비인 민비와 아버지 대원군의 권력 다툼 속에 안절부절 하였으며 민비가 외적의 손에 피살당하였으나 힘이 없어 통곡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일로 인해 아버지 대원군과는 의절한 채 아버지 장례식도 모른 체 했다. 비운의 왕이였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늘 마음이 불안하여 용하다는 무속인과 역술인들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였다.
왕의 이런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왕에게 사기를 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충주에 사는 성강호는 죽은 민비의 혼을 불러들일 수 있다하여 고종 앞에 서게 되었다. 어전에 불려나온 성강호는 갑자기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려앉은 다음 “지금 돌아가신 명성황후의 혼령이 이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라고 하니 고종은 의자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했다. 성강호는 한술 더 떠서 “그렇게 요란을 피우시면 혼령이 놀라 떠나버립니다! 조용히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고종은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며 울음을 삼켰다는 웃지 못 할 사실이 전한다.
강원도 통천 사는 또 하나의 사기꾼 김원동이라는 자는 요술병 하나를 들고 어전에 들어 당시 몹시 아팠던 엄비의 소생 영친왕의 병이 언제 나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아 맞혀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강원도 금화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앞서 기술한 성강호는 한층 더 떠서 협판(지금의 차관급)까지 올랐으니 망조가 든 조선의 인사 행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사기꾼들과는 다른 진짜 정통 역술인이 있었으니 현릉참봉 정덕환이다. 정덕환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고종을 알현한 지리에서 “근자에 궁 안에 불이 날 화변의 염려가 있사오니 각별히 조심하시어 예방해야 될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깜짝 놀라며 “어느 날 어느 시에 불이 날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이에 답하기를 “다음달 12月 그믐쯤에 날 것입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어느 방위에서 일어 날 것 같은가?”라고 하며 점점 깊숙한 답을 물었다.
이에 대해 정덕환은 “함녕전 바로 남문(南問)입니다!”라고 정확한 위치까지 예언했다. 고종은 이에 만족치 않고 “이 불이 정전까지 침범 하겠는가?”라고 묻자 “거의 침범 할 겁니다. 그러나 군졸로 하여금 잘 지키게 하시면 불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만족치 않고 고종은 또 “어떻게 하면 잘 지킬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필자에게도 이런 고종 같은 매우 까다로운 질문을 만들어서 하는 고약한 손님들이 가끔 있다. 이런 사람들과 상담하다 보면 짜증이 울컥 솟아오르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필자의 직업 탓이요 업보인 것을! 아무튼 정덕환은 답한다. “군졸 수 백 명으로 하여금 매일 밤 궁중과 궁 밖을 돌게 하여 근처의 인가를 조심 시키면 될 것입니다.” 정덕환의 예언은 적중하여 이해 12月 그믐날에 덕수궁 가까운 민가에서 불이 나고 말았다. 불은 청국인(때놈)이 경영하던 석물공장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이웃집으로 번져 수십 채가 탔다.
이때 이 사건의 목격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2월 그믐날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싸락눈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하늘과 땅이 어두컴컴하여 마치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날 초저녁이 지난 후에 갑자기 한바탕 광풍이 불더니 나무가 부러지고 집이 쓰러졌다. 얼마 후 함녕전의 정문 밖 청국인이 경영하는 석물공장에서 불이나 인근 민가 수십 채를 연소시킨 뒤 불길이 맹렬해져 함녕전 정문을 범하였다. 그러나 바람이 더욱 세게 불어 진화 할 수 없었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매서워 사람들이 연기 때문에 불을 끌 수 없었다. 성 안 팍의 백성들이 힘을 다하여 불길을 잡으려 했으나 손을 쓰기 어려웠다. 화염은 점점 정전에 육박하였다. 이때 진고개(충무로 입구)의 일본소방대가 달려와서 소방기계 수십대로 근근히 불을 꺼 함녕전은 우뚝하게 홀로 남았다. 불행 중 다행 이였다.”
정덕환이 한달전 함녕전에 불이 날 것임을 예언하였고 고종은 이에 대해 짜증나리만치 세세한 부분까지 묻고 이에 대한 비책까지 듣고 나서는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전혀 대비조차 안한 것이다. 이날 밤 조정의 백관들이 와서 함녕전의 안전을 축하하였고 머리털이 불에 그을리고 이마에 화상을 입은 군졸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때를 당하여 전화과장 이재찬이 엎드려 고종에게 “정덕환이 앞날을 미리 알고 맞히는 것이 귀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고종은 “정덕환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재환은 “11月29일 날 현릉참봉에 임명하신 그 정덕환이 그 자리에서 오늘날 큰 화변이 있을 것이라 아뢴 일이 있는데 폐하께서는 기억이 안 나시옵니까?”라고 하니 “짐(朕)이 근래에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벌써 잊어버렸다.”라고 했다.
필자에게도 고종처럼 이것저것 시험하듯이 까다롭게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묻고는 나중에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그래서 노트와 펜을 손님자리에 준비해 놓고 필자가 하는 말을 적을 것을 적극 권유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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